▶ 정의를 외면한 채 신앙과 사랑만 외치는 고귀함은 사치다
1993년 한인상인들의 무고한 생명이 강도들의 손에 죽어 나가자 워싱턴한인연합회는 경찰국을 수시로 방문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왼편부터, 토마스 경찰국장, 최병근 연합회 회장, 1관구 서장 모습을 내 사진기에 담았다. 당시 나는 1관구 1과 계장이었다. 뒷면 벽에는 당시 살인 통계 지표가 붙어 있다.
# 내 첫 American Silver Dollar
나는 은화를 좋아한다. 은은한 은빛의 고급스러움과 손끝에 감지돼는 부드러움이 좋다. 고1때 7-11에서 손님에게서 처음 받아본 은화 동전은 멋있었다.
당시만 해도 은화가 일반 생활에 유통됐었고 카지노에 가면 큼지막한 Ike(아이젠하워 대통령) 1불짜리가 슬랏 머신(slot machines)에 넘쳐났었다. 그날 받아본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와 여신이 각인된 은화는 내 손 안에서 빛났다.
아버님은 1불을 그분 주머니에서 끄집어내서 계산기 안에 넣으시더니 그 동전을 내게 그날 선물로 주셨다. 그렇게 얻은 첫 은화 동전은 아직도 내 골프 백에서 퍼팅에 운이라도 따라 주라며 골프 공 마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다른 은화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 이야기를 하겠다.
1967년산 JFK 은화. 이 사장님에게서 받았던 50전 동전으로 지금도 내 바지 주머니에 소지하고 다닌다.
1976년 7-11에서 일할 때 아버님에게서 받았던 1884년 Morgan Silver Dollar. 부모님 모두 떠나고 은화만 남았다.
# 리커스토어에서 마주친 주정뱅이들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나무 군웅들에게서 파랗게 새 생명이 피어오를 무렵 갈증을 해소하고자 5th와 M에 위치한 리커 스토어 앞에 순찰차를 세웠다. 가게 바로 옆에 제법 큰 교회 첨탑에 달린 은빛 십자가가 봄 햇살에 눈부셨다.
상점 안에 들어서니 취기에 자세가 흐트러진 노인이 수중에 돈도 없으면서 계속 술을(Wild Irish Rose)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5년 전 가게를 인수한 이 사장님은 아침부터 노인이 와서 저러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술과 음식 찌꺼기가 떡처럼 붙어있는 주정꾼의 소매를 잡고 가게 밖으로 내보내고 나니 또 다른 주정꾼이 마음씨 착한 이 사장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I wanted Benson & Hedges Menthol and non-filter Chesterfield, why are you confused man?”
이 사장은 필터 없는 체스터필드 담배는 없다고 몇 번이나 설명했다며 나를 보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다툼하려는 주정꾼을 내보내고 나니 이번에는 두 어린 아들을 대동한 아빠가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한 아이가 손에 든 사탕을 나에게 자랑하며 말했다
“Hey, police man, I got 25 cents worth, Jimmy got 35 cents worth, 25 and 35 are 55!(경찰 아저씨, 나는 25전 어치, 지미는 35전 어치 합해서 55전어치 샀어)”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빠가 “What you say? that’s 60, what you learn from school, boy? (뭐라고? 60전이지 넌 학교에서 뭘 배우는 거니?)” 하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 옆에 서 있던 다른 아이가 끼어들며 “I can alphabet from A to X (나는 알파벳을 A에서 X까지 해!)” 하며 자랑했다. 아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미세스 이가 계산대 위에 놓여있던 사탕 바구니 안에서 사탕 두개를 집어 들어 그 아이들에게 하나씩 건네며 말했다. “Good boys(착한 아이들).” 아빠가 고맙다고 인사하라고 시키니 한 아이는 사탕만 받아 들고 아빠 뒤에 숨고 한 아이는 수줍게 “탱 큐” 하고는 자기 사탕이 더 좋은 거라며 자랑했다.
# 거스름돈 50전
두 명의 주정꾼을 내보내고 갈증에 음료수를 하나 샀는데 이 사장이 거스름돈으로 50전 케네디 은화를 건네며 “안 경사 수고 많아요. 이 은 동전으로 안경사에게 행운과 승진이 오면 좋겠네.” 하며 웃어 주셨다.
“감사합니다. 이런 동전 많이 들어와요?” 하고 물으니 “술이 급하면 뭐든지 가지고 옵니다.” 하며 서글픈 눈을 하셨다.
보통 흑인 주민들과 한인 상인 사이의 마찰은 주로 언어 소통에서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서 왔다. 그러나 이 사장님 부부에게는 그런 보편적인 문제를 찾을 수 없었다. 우선 이 사장은 자신의 가게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했다. 그분은 누가 건의한 일도 아니었는데 자발적으로 건물을 깨끗이 포인팅 했고 가게 밖에 전등을 설치해서 어둡던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또한 건물 주위에 펜스를 설치해서 주정꾼들이 버리는 쓰레기와 방뇨를 방지했다.
주인 부부는 독실한 교인으로 주일날 가게 옆 흑인 교회에도 참석하고 동네 파티(Block Party)때마다 음료수를 제공하고 이웃 유치원에 성금도 내곤 했는데 이러한 5년간의 꾸준한 노력은 상식 있는 주민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더 바랄 수 없는 좋은 이웃사촌이었다. 두 자녀는 이미 대학까지 졸업한 후여서 노후대책으로 열심히 살아가던 부부는 가게에 주정꾼들이 말썽 부려도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었다.
# 예기치 못했던 비극
인간사에 평생을 착하고 법대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닫치는 비극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당시 ‘삐삐’ 또는 “페이저(Pager)’라 불리던 호출기를 허리에 차고 다녔다.
늦은 저녁시간 비번이던 나의 무선 호출기에 번호가 떴다. 상관이던 Captain Fonville(경정 폰빌)이었고 급히 Weiman Liquor로 가라는 지시였다. 당시 DC 경찰관들은 DC에 거주해야 했었다.
차를 몰고 한밤중에 달려간 가게 앞은 노란 경찰 테이프가 쳐져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상점 안에 들어서니 카운터 안쪽 바닥에 피가 낭자했다. 이미 도착한 형사대와 감식반(CSI)에 물어보니 이 사장님은 가슴에, 사모님은 복부에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다수의 주민 목격자들이 강도범을 보았으니 검거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검거도 중요했지만 다친 분들이 더욱 걱정됐다. 썰렁하게 열려있는 빈 계산대가 주인을 잃은 빈 가게 마냥 텅 빈 듯한 내 가슴을 후려쳤다. 혹시 모르는 일이라서 가게 벽과 달력에 한글로 쓰여 있는 연락처 이름들을 내 수첩에 기입했다.
그렇게 현장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던 중 경찰 무전기에서 “The owner was pronounced dead(주인은 사망하셨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내 손에 든 펜의 동작이 일순간 멈추었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이 사장님이 내게 건네 주셨던 그 50전 동전이 잡혔다. 한 고귀한 생명은 가고 동전만이 주머니에 있는 사실이 애처롭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기둥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나?
자정이 지나서야 현장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차에서 비지스(Bee Gees)의 ‘Tragedy’와 ‘Staying Alive’가 ‘비극’ 속에서도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우쳐 주는 듯 멜로디로 흘러 나왔다. 싸늘한 밤바람과 가사 제목들이 한인상인들이 처한 안타까운 현실을 말해 주는 듯했다.
다음날 저녁, 근처 흑인 목사님은 상점 앞에 모여든 주민들 앞에서 “they were pillars of this community(그들은 우리 사회의 기둥이었습니다)” 라며 아쉬워했지만 이 사장님은 우선 한 가정의 기둥이었다. 기둥이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지는 것 아닌가. 무너진 가정들이 어떻게 좋은 사회를 구축할 수 있을까? 이러한 재앙을 방지할 더 큰 더 약발 나는 말씀과 행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를 외면한 채 신앙과 사랑만 외치는 고귀함은 사치다. 내 관할구역에서 먹고 살자고 사업하시던 이 사장님에게 한순간 찾아온 비운, 그리고 그분에게서 받았던 50전 거스름돈 은화는 아직도 내 주머니에서 숨 쉬고 있다.
<다음에 계속>
글·사진/ Jeff Ahn
(jahn8118@gmail.com)
<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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