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들려주는 ‘뉴욕지역 독립운동 발자취’ <5>
일제 강점기 미국내 한국 유학생들은 독립운동에 힘이 되었다. 사진은 1932년 유학생 동부대회에 참석한 한국 유학생들.
▶안창호, 상해서 연합운동 성과 못내고 뉴욕으로 와 서재필·이승만 등과 회동
▶뉴욕한인들 애국운동에 큰 감명
도산(왼쪽)과 장이욱.
■뉴욕에서 활동한 애국자들
세계1차대전후 뉴욕은 정치,경제,예술,과학,의학 등 모든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며 세계도시로 급부상했다. 이에 따라 한국의 뜻있는 학생들 특히 독립운동가들이 뉴욕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뉴욕을 중심으로 애국운동을 하던 인사들중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독립운동 유공자 30인은 대한민국장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장면. 독립장 조병옥 천세헌 윤병구 김마리아 정한경, 애국장 곽림대 김도연 황애덕 정일형 이복원 황기환 배민수 김경,김양수 변준호, 애족장 안정수.김여제.임초,남궁염.정태진, 국포장 이진일,최용진,김창세,차진주,김홍기, 대통령표창 신마실라(이상은 뉴욕한인교회 역사편찬위원장을 맡았던 윤창희의 조사기록) 등이다.
이외에도 장이욱,이용설,장덕수,이철원,오천석,한승인,임창영,박인덕,김활란,서은숙 박은혜,임배세(금주가 작사 작곡) 등이며 알려지지 않은 애국자들도 많다.
위의 애국자 명단에 가장 눈에 띄는 분이 서재필과 이승만, 안창호이다.
갑신정변으로 미국으로 망명한지 10여년만에 귀국한 서재필이 대한제국의 유신과 개혁의 사명을 갖고 독립협회 조직 및 독립신문 발행과 함께 중국사신을 영접하는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그때 20대의 청년 안창호와 23세의 이승만이 회원이 되었다
안창호는 서북지역을 맡아 유신과 개혁의 연설을 하며 군중으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이승만은 서울을 중심으로 서재필의 개혁운동을 도우며 배재학당의 협성회보 주필을 맡아 구국 계몽에 힘썼다.
안창호도 회원으로 도왔다. 독립협회의 열기는 지각이 있는 청년들을 각성시켰다. 독립협회 회원인 남궁억과 이상재등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한다는 익명서 사건이 발각돼 체포됐다.
이때 이승만은 배재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 밤샘농성을 해 석방되었다. 그러나 한달후 고종 퇴위음모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또다시 투옥되었다. 1891년 1월 역모죄로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을 당했는데 거의가 독립협회 회원들이었다.
이승만도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이씨 가문의 양영대군 직계이고 그의 아버지의 노력으로 사형은 면했으나 역모죄를 추궁받은 모진 악형을 받아야 했다.
이승만의 배재 스승 주시경이 육혈포를 비밀리에 이승만에게 반입 시켜 그것으로 간수들을 협박하여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즉시 체포되어 목에 칼을 쓰고 쇠고랑을 차는 고통을 감수했다.
그럼에도 선교사가 들여보낸 영어성경과 책들을 읽으며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였고 영한사전도 만들었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1904년 8월 석방되었다. 한성감옥 구금 5년 7개월 만이다. 서른이 가까운 이승만은 석방즉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탈출했다.
그는 미국 체류 6년만에 조지워싱톤대 학사,하버드대 석사,프린스턴대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나이 35세,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해였다.
당시 워싱턴 DC가 국내 정치 중심이었다면 뉴욕은 세계정치의 중심이었다.
■안창호 애국강연에 교인전체 눈물바다 애국의 눈을 뜨게 해준 서재필이 필라델피아에 있었기에 이승만의 정치 활동무대가 하와이에서 뉴욕으로 옮겨질 수 밖에 없었다.
뉴욕한인교회는 이들의 애국운동 회합장소가 되었고 강연장이 되었다. 이즈음 안창호는 상해임시정부에서 연합운동의 성과를 이룩하지 못하고 미국을 향해 떠났다. 유럽을 거쳐 뉴욕에 도착한 것이다.
1924년 초이다. 그때 도산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대한독립의 희망이었던 상해임시정부는 파벌 싸움으로 와해되었고, 우남(이승만)이 주도한 구미위원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기구라고 주장하는 만큼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또한 구미위원부 초기에는 서재필도 이에 적극 도왔으나 자체 내 공채 발행이후 김규식과 탈퇴했다.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흩어진 상태라 도산 안창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독립운동의 길을 보여준 은사와 같은 서재필 그리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강력 추천하였던 도산이었다. 분명 이들과의 회동이 뉴욕을 찾은 도산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별로 성과가 없었기에 기록이 없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도산은 뉴욕에 도착해 장이욱을 만났다. 그도 그럴 것이 장이욱이 1916년 11월 하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LA에 도착해 먼저 도산을 찾았다.
몇일 도산의 집에 지내며 진지한 조국의 장래를 토로했고 애국운동의 첫걸음이 흥사단 입단이라는 확신에서 도산의 문답을 받고 단우 번호 71번으로 입단한다. 1917년 8월28일이다. 장이욱은 아이오와의 더뷰크 대학과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 후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과정의 교육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때 유석 조병옥도 박사과정 중이었다. 조병옥은 흥사단 창립(1911년) 당시 충청도 대표로 단우가 되었다. 도산은 이어 조병옥, 윤흥섭, 김도연. 장덕수를 만났다. 한승인 회고록에 보면 도산이 교회에서 애국강연을 할 때 교인전체가 눈물바다였다고 한다.
강연이라기보다 열변이었다. 도산이 얼마나 뉴욕에 체류하였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여러 동지들을 만나고 교회에서 애국강연을 한 것으로 보면 여러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도산은 장이욱을 대동하고 자동차로 대륙을 횡단했다.
시카고에 동포와 학생들을 만나 애국심을 토로하였다. 철도공사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유타주 솔트 레이크시도 방문했다. 뉴욕한인교회 70년사에 기록된 박제순은 염호여관을 한국노동자들의 유숙처로 제공하며 봉사를 했다.
그때 100여명 이상의 한인 노동자들이 콜로라도와 유타주를 잇는 공사장에서 일했다. 로키산맥을 뚫고 중부로 뻗어나가는 난공사였다.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환,전명운도 바로 이 공사장에서 일했는데 퍼시픽 철도공사였다. 도산은 6개월만에 식구들과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는 LA에 도착했다.
장이욱에 의하면 당시 “도산은 조국의 희망을 보았다”고 회고 한다.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에게는 실망했지만 뉴욕의 동포들과 학생들, 시카고의 학생들, 그리고 노동을 하면서 모아놓은 돈을 아낌없이 독립후원금으로 바치는 동포들에게 희망을 보았다. 특히 뉴욕 동포들의 활기 넘치는 생활력과 애국운동에 감명 받았을 것이다.
둥지 (장철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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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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