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들려주는 ‘뉴욕지역 독립운동 발자취’ <6>
1919년 4월14~16일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선전하기 위해 서재필 주선으로 열렸던 한국인의 대대적 모임인 한인자유대회.
▶ 신한회, 1917년 뉴욕서 열린 소약국회의 참가 조국독립 호소
▶ 해외한인 조국독립 운동 일으킨 계기
▶ 서재필 주도로 회지·월간지 등 발간
▶ 미국과 전세계에 한국사정 알려
신한 민보
안창호가 발간한 공립신보.
■동부지역 독립운동단체와 언론사들
뉴욕한인교회 윤창희 역사편찬 위원장에 의하면 뉴욕지역에서 생겨난 독립단체로는 국민회 뉴욕지회, 대한인동지회, 흥사단, 뉴욕한인교민단, 뉴욕한인공동회, 뉴욕한인중앙위원회, 재미조선 문화회, 북미유학생 총회, 근화회, 미주동부 대한부인회, 조국광복추진회, 뉴욕재만(중국)동포옹호회, 친한회가 있다. 당시 언론사는 코리안 스튜던트 불리틴( The Korea Student Bulletin), 삼일신보, 자유한국, 서재필이 주도한 월간 대한평론, 대한통신부 등이다.
이밖에 워싱턴DC에서 이승만에 의해 조직된 한국위원부는 뉴욕에 지부를 두었는데 천세헌, 임초, 이원익이 주로 활동했다. 이승만이 상해임정과 관계를 끊고 미주내 임정의 성격을 띤 독립단체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이외 뉴욕에서 태광회가 조직돼 이승만을 도왔다. 이상은 1919년 3.1운동 이후 일어난 독립운동 단체이다. 그러나 그 이전 뉴욕과 필라델피아에 독립단체와 중요한 회의들이 있었다.
특히 1917년 10월 뉴욕에서 열린 소약국 회의(The league of small and subject nationalities)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회의였다. 조선독립에 유일한 기회임을 깨달은 뉴욕의 한인들은 유학생들과 더불어 신한회를 조직했고 위원으로 신성구, 조병옥, 김원식, 이원익 등 18명이 맡았다.
이들은 김헌식, 이원익을 외무위원으로 선정하고 소약국 동맹회의 7인 이사위원회 한인대표로 김헌식을 대표로 선출했다. 대한인 국민회의서는 뉴욕으로 정한경과 민찬호를 보내고 박용만을 대표로 소약국회의에 참가하게 했다.
이 회의 주제 연설을 맡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역설했다. 약소국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의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한국대표들은 각국 대표와 상·하 양원 의원들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뉴욕의 유력한 신문에 일본의 만행을 폭로했고 한국의 독립을 홍보했다.
또한 신한회 (The new korea association) 대표격인 김헌식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신한회 총회 결의문을 미 대통령과 상하의원, 소약소국국회에 보내며 파리강화협의회에 참석할 것을 AP통신 등에 배포해 국제사회에 알렸다. 이러한 사실이 1918년 12월10일 일본 고베에 영국인이 발행하는 “Japan Advertiser” 와 “Japan weekly”그리고 “동경조일신문” 에 실려 재미한인이 모금운동을 벌인다는 기사가 12월15일자에 실렸다.
재일 유학생들은 이에 자극을 받고 동경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2. 8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약400여명이 모였다. 이광수가 쓴 독립선언문에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서춘, 최근우, 송계백이 서명을 했고 여성 유학생 친목회장 김마리아와 황에스더가 인쇄물을 준비했다. 일본의 정부관료, 각국대사와 공사, 조선 총독부, 언론사에 배포하고 동경조선기독회관에서 김도연이 2.8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참조, 윤병욱 저, 나라밖에서 나라찾았네)
이러한 영향과 자극으로 공립협회 회원 이재명의 이완용 저격 미수사건, 장인환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사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안창호의 신민회 비밀결사조직, 박용만의 독립군단훈련, 파리 강화회의 독립청원 운동, 독립모금운동 등 LA와 뉴욕을 비롯한 해외한인들의 중요한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마리아와 차경신은 2.8 동경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국내로 가져와 뜻있는 여러 인사들에게 전하고 마침내는 3.1 운동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필라서 결성된 대한친우회 회지발간 미국에 한국사정 알려
그리고 기억해야 할 단체는 서재필이 주도한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다.
서재필은 3.1 운동직후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한인회의를 조직한 것이다. 주로 뉴욕의 유학생들이 참석했다. 1919년 4월 첫모임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호소문을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해 미국, 일본 평화회의에, 그리고 결의문을 요소에 발송했다.
대한인 국민회에서도 재정지원을 했다. 이에 영향을 받고 한인유학생회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이어 서재필은 국민대회를 개최했는데 주로 뉴욕에 거주하던 임초, 정한경, 천세헌, 신성구 등 졸업생들과 재학중인 조병옥, 임병직, 장덕수, 윤영선, 노디김, 이용직, 이춘호, 강영대, 김영기, 김현철, 유일한 등 주로 유학생들이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필라델피아에서 ‘대한 친우회’(The League Of The Korean Frends)가 결성 되었다. 주로 기독교인 중심으로 목사, 교수 등이 참여했다. 친우회는 활발히 미주지역 20여 지방에 조직되어 독립운동을 홍보하는 대한친우회 회지와 대한평론 월간지를 약 3년간 발간했다.
발행처는 재미 한인 유학생회로 되어있다. 이들은 벌써 재미한인 유학생지 ‘Korean Student Bulletin’을 발간하고 있었다. 이 회지는 3.1 운동 이전 파리강화회의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다.
대한친우회는 각지역 순회강연을 통해 독립운동을 호소하며 한국의 사정을 미 전국에 알렸다. 연사로는 서재필, 이승만, 정한경, 호머 헐벋 선교사, 흐로이드 톰킨스 대한친우회 회장 등이었다.
미국 서부에서는 도산 안창호가 공립협회를 1905년 11월 14일 조직하고 바로 20일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또한 정보 통신수단으로 국내외의 동포들의 사정을 알렸다. 후에 공립협회가 대한인 국민회로 조직되면서 (1909년 4월) 공립신문은 신한민보로 개편되었다.
100여년이 넘게 신한민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주지역 동포들의 사정과 독립운동의 이어지는 애국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역사적 자료이다. 독립운동의 방법과 의견이 달라 연합하지 못한 안타까운 면이 있지만 이승만과 서재필의 독립청원을 위한 대미외교를 벌인 것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초석이 된 것은 간과할 수 없다.
서부를 중심한 미주에서 공립협회를 이어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를 중심으로 안창호 박용만이 민주대의제도를 채택, 무형자치정부로 성장하여 상해망명정부의 가교역할과 자금지원을 했고 원동지방의 독립투쟁세력을 도왔다.
안창호를 후원하는 흥사단, 이승만을 지원하는 동지회, 그외 한국구미위원부, 대한평론, 한국친우회 등이 공존하면서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로 결성돼 임시정부와 외교위원부 그리고 광복군을 후원하는 역할을 하게 됐다.
나라를 다시 찾는 운동 뿐 아니라 잃어버린 나라를 보전하려는 몸부림친 선조들의 심정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이 국가건설의 초석이 되었음은 물론 조국을 지키는 영구한 얼의 유산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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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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