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들려주는 ‘뉴욕지역 독립운동 발자취’ <7>
[사진]
▶ 김마리아·박인덕, 뉴욕한인교회서 만나‘근화회’ 결성
▶ 여성 독립운동가 자긍심·여권신장운동의 싹 되기도
■뉴욕에서 꽃피운 한국 여성들의 애국활동
1910년께 미주에서 눈에 띄게 애국활동을 한 이들을 들라면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윤병구, 김규식, 박용만 등을 꼽을 수 있다. 한인단체와 애국활동에 전심전력을 다한 이들중 윤병구가 뉴욕한인교회 3대 목사로 부임한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1927년부터 뉴욕한인교회를 시무한 그는 1936년 사임을 했지만 1939년 까지 뉴욕에 12년을 있었다. 미국에 불어 닥친 경제공황기에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가장 활발한 애국운동을 펼쳤다.
그는 하와이서부터 독립운동을 같이한 이승만과 워싱턴 DC 정가에서 외교활동을 하는 서재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운동을 더 활발히 할 수 있었다. 그가 12년 이상을 뉴욕에 머무른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윤 목사가 있는 동안 독립운동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 있다. 그것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활동중에 여성들의 애국운동이 새롭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1928년 김마리아가 뉴욕으로 오면서 시작됐다.
김마리아는 1924년 7월11일 상해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뒤 곧장 도산 안창호의 집을 찾아 부인 안혜련의 도움을 받아 안정을 찾았다. 그해 9월 미네소타주 파크대학에 입학해 2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1926년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 진학하여 1928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곧바로 뉴욕신학대학(당시 Biblical college)에 입학, 졸업을 했다.
그는 뉴욕한인교회에서 먼저 온 동지들을 만났다. 대부분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같이 하며 옥고를 치렀던 동지들이었다. 동지들과 한국의 대한애국부인회를 이어가는 취지를 살려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을 상징하는 무궁화의 의미를 살려 ‘근화회’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회장 김마리아, 서기 이선행(김마리아 정신여고 동창,흥사단 단우), 재무 남궁조앤(남궁염 초대 뉴욕총영사 부인), 총무 황애덕(초대 대한부인회 부회장,송죽결사대 창립회원), 그외 안헬렌,윤원길,김애희 주영순, 임메리, 유동지 박인덕(유관순의 스승,서대문 감옥에 같이 있었고 유관순의 순국을 최초로 알린 사람) 등이었다.
1928년 2월12일 오후 8시 근화회 발대식을 교회에서 열었다. 식장에는 태극기,근화회기,벽에는 겨레의 상징인 무궁화 꽃으로 장식했다.
애국가를 부를 때는 눈물바다였다. 회장의 인사말과 더불어 근화회 취지를 발표했다.
요약하면 단결과 실력양성, 국제사회에 독립운동에 대한 홍보와 후원이었다.
이를 위해 실업부,교육부,사업부를 두었다. 이날 참석한 남자들로 홍득수(교민단 단장),임초(애국지사 서재필 박사가 주최한 제1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 결의안 작성 3인중 하나)가 축사를 했고 윤병구 목사가 행사를 후원했다.
근화회는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뉴욕한인교회를 근거로 활동하고 있는 동지회, 흥사단 ,한인 교민단, 국민회 뉴욕지방회 등과 독립군을 도우며 연합해 뉴욕재만동포옹호회를 조직하여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 독립운동을 도왔다.
교회 자체로서는 만주사변이후 1931년 12월 윤병구 목사를 중심하여 장석영, 윤흥섭, 홍태호,황창하, 정일형 등으로 대책위원회를 구성, 만주의 한인들을 도우며 일본의 간악한 획책을 폭로했다.
교회에서 결성된 근화회는 뉴욕사회에 여성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여성의 애국에 대한 자긍심과 여성도 남성에 못지않게 할 수 있다는 여권신장운동의 싹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표적인 두 여성이 있었다. 김마리아와 박인덕이다.
■ 여권신장에 헌신한 박인덕
김마리아는 애국의 어머니로 온 생애를 바침으로써 근본을 보여주었고 박인덕은 여성도 생활력을 길러 생활권을 주도할 수 있고 애국을 위한 정치참여를 할 수 있다고 보고 여권시장에 헌신했다.
그의 여성에 대한 권리와 주장은 1954년도에 출판된 “9월 원숭이(September Monkey)란 저서에 잘 나타나있다. 영문으로 뉴욕에서 출판된 이 책은 당시 최고의 부수를 발행하는 기록을 남겼다. 판매된 수입금으로 인덕학원을 설립했다.
1941년 덴마크를 방문하여 교육현황을 살펴보고 그에 걸맞게 여성 자립을 돕는 실업학교 ‘덕화여숙’을 설립한 것이다.
당시 학교운영을 위해 친일단체 녹기연맹의 지원을 받고 친일행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교장으로 있으면서 반일감정을 교육했다는 이유로 학교는 폐쇄됐다. 평생 여권신장과 애국을 위해 몸바친 박인덕이 애국자 명단에 오르지 못한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4년간의 학교를 위한 친일행적으로 그녀의 평생 애국의 업적과 여권신장의 위대한 사역을 지워버릴 수 없지 않은가. 인덕학원은 덕화여숙의 후신이고 현재 인덕예술 공과 전문학교로 계승되고 있다. 그의 맏딸이 이사장을 맡아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박인덕은 1928년 도미, 조지아주 웨슬리안 대학에서 사회학으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1930년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육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뉴욕한인교회를 출석하며 독립운동을 한 한 것이다. 그가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지원운동에 가담하여 유럽과 미국순회 강연을 260여회 했으며 32개국을 순방했다고 한다.
■ 한국의 잔다르크 김마리아
이어서 김마리아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54세에 순국하기까지 평생을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이다.
그의 살아온 과정을 살펴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나라를 위해 몸 바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보내신 나라의 어머니였다. 반만년 역사의 조선 어머니들의 애국혼과 지조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당시 미국내 한국 유학생들은 김마리아를 한국의 잔다르크라 불렀다.
그가 상해로 탈출했을 때 도산으로부터 결혼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3.1 운동 주모자로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를 때 만신창의가 되는 고문을 당한 것은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성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성고문을 받아 유방 하나를 잃었다. 또한 성기능을 완전히 잃었다는 일설도 전해온다. 결혼을 거절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서력을 사용했다. 재판장의 회유 질문에도 대한의 여성으로 나라를 위해 애국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 아니냐 항변으로 초지일관했다.
지금도 보관되어있는 마지막 입었던 저고리가 그의 기념관에 있는데 저고리 앞면 기장이 짝재기로 되어있다. 왜냐면 한쪽 유방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조국의 순국한 여성 애국자를 들라면 한분은 감옥에서 방광파열로 순국한 유관순이고 감옥 밖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애국의 열변을 토하다 고문후유증으로 숨을 거둔 김마리아다.
원산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강의중 고문후유증으로 쓰러진 것이 마지막이었다. 1944년 3월 13일이다. 이러한 어른들이 뉴욕을 거쳐 갔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강물흐르듯,바람지나듯,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조국을 비춰주는 등대가 되었고 애국의 보금자리를 만든 둥지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들 피 속에 그들의 혼과 얼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간직하고 후손에게 이어주어야 할 것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