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들려주는 ‘뉴욕지역 독립운동 발자취’ <8>
4대 임창영 목사
▶ 뉴욕한인교회 4대목사 임창영
▶ 각종 시위 주도 애국운동 이끌어
▶ 청년교인 10명 미군 입대
▶ 여성 교인들은 독립자금 조달
■ 미군 입대 뉴욕한인교회 젊은이들
미군입대 뉴욕한인교회 젊은이들
1936년은 잊지 못할 해이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의 월계관을 쓴 날이다. 잠자던 반만년 역사의 민족혼을 다시 한번 일깨운 날이다.
윤병구 목사에 이어 4대목사로 부임한 임창영 목사는 부임한지 한 달도 못된 시기였다.
1936년 10월 16일 임 목사는 교인들을 소집하고 한인들을 규합하여 일본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일본은 1935년부터 국내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한국교회를 분리시키고 신앙의 지조를 지킨 주기철 목사는 감옥에서 순교했다.
1937년부터는 한국어 사용을 금지시키는 탄압정치를 하고 있던 때였다. 또한 애국자들을 색출하기위해 수양동우회 회원들을 구금시켰다. 이때 창설 주요인물인 김동원, 주요한, 주요섭, 이광수 등이 모두 구속됐다.
일본은 중국대륙침략으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임창영 청년목사는 1937년 9월 17일 교인들과 한인들을 규합하여 일본영사관 앞에서 2차 시위를 벌렸다. 중국침략을 규탄하고 일본상품 수입을 전면금지하라는 시위였다.
많은 중국인들이 시위에 참가해 5번가 일대가 교통마비가 되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많은 한인들이 중국인으로 국적을 바꾸어 살고 있었음을 이때 알게 되었다. 나라 없는 백성의 민족적 비극이었다.
26세의 청년 목회자는 뉴욕한인교회를 부임하면서 몇달만에 애국자가 되어있었다.
그는 3차 시위를 주도했다. 1937년 12월 16일 한인들과 중국인들이 합세해 미국에 대해 전쟁무기 대일수출금지와 일제상품 수입 전면금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역시 일본영사관에 집결한 시위였다. 일본은 많은 전쟁물자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고 또한 미국은 일본에서 많은 생활용품을 수입하고 있었다.
그때 초당의 작가며 뉴욕대학의 교수인 강용흘이 임 목사의 권고로 강연을 맡아 열변을 토했다. 그는 뉴욕한인교회에 기숙하는 교인이었다. 임 목사는 3번의 커다란 시위로 애국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임창영 목사는 1910년 10월 30일 황해도에서 태어나 기독교가정에서 성장하면서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당시 교장인 맥큔(한국명 윤산온)의 권유로 1930년 도미해 펜실베니아 라파예트 대학에 입학했다.
재학중에 일찍이 서재필이 1892년에 졸업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그의 인격과 애국심에 많은 감화를 받고 서재필의 비서도 역임했고 후에 서재필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1934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1년 후 뉴욕신학대학에 입학하면서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뉴욕한인교회에 출석하였고 동양기독학생연맹(Oriental Student Federation Of New York)에 참가했고 얼마 안 되어 회장이 되었다. 이 단체는 김활란이 1928년께 2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때에 신학생인 젊은 청년이 1년도 안돼 뉴욕한인교회 담임자가 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재정형편이 생활비를 충분히 부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6년 동안 목회를 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자기생애에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으나 가장 보람 있었던 시기였다고 한다.
“나는 목사요, 동포를 이끈 애국자요, 심부름꾼이요, 외교관(후에 유엔대사)이었다”고 술회한다.
추방당할 뻔한 동포를 변호하여 모면케 하고,구속 직전의 동포의 억울함을 변호하여 구출하였으며, 교회내 거주하는 무직자를 돌보며 많은 병자들을 병원으로 이송하고 사망한 교인들의 장례를 주선하는 등 젊음을 바쳤다고 한다.
그때 교회내 거주자가 80~100 명에 이르렀는데 거의가 무직자로 하루 품팔이 노동자였다고 한다.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으면 일주일이 못가 다 없어졌다. 굶고 있는 그들을 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임하기 1년전 일본이 진주만 기습폭격을 해 다음날 1942년 12월 18일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때 미주동포들은 한국의 독립에 대한 가능성을 느끼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워싱턴 DC 광장에 모였다.
1942년 2월 27일부터 3일 동안 계속된 이 대회의 명칭은 한인자유궐기대회 (The Korea Liberty Conference)였다. 뉴욕한인교회 교인 모두와 뉴욕동포들을 이끌고 임목사는 참석했다. 궐기대회의 주요연사로 서재필,이승만,호머 헐버트(고종황제의 가장 신임받은 선교사), 아메리칸 대학의 총장 폴 더글러스, 전 카나다 대사 크럼웰, 여류작가 휘치,뉴욕한인교회를 대표한 황창하 등 다수였다. 3
일 동안 계속된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3.1절 독립선언문을 재확인할 것, 미국정부가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 한국의 유엔가입을 도와줄 것 등 5개 항목이었다.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이야말로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역설했다.
미주동포들은 벌써 미국을 지원하는 의미에서 6만1,976달러25센트에 달하는 방위채권을 구매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포의 자녀들이 미군에 입대했다. 뉴욕한인교회에서도 10여명의 청년이 입대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110명으로 구성된 한국인 예비부대가 창설되었다.
뉴욕한인 교회는 1928년 시작된 여성애국단체인 근화회를 계승하여 “미주동부대한부인회”를 조직했다. 1942년 1월 4일이다. 회장은 교인중 뉴저지에 거주하는 김계봉 의사의 아내 김애경이다.
당시 유일하게 자가용을 갖고 있었다. 한달 후 144달러50센트를 적십자사 뉴욕지부에 보냈고 수로 만주의 독립군을 위한 독립자금을 송금했다. 또한 군에 입대한 청년들에게 위문품과 서신을 보내어 위로하기도 했다.
뉴욕한인교회는 트럭 한대를 구입 할 수 있는 자금을 보냈으며 모금을 위해 교회내 연극팀을 조직해 공연을 하기도 했다. 출연자는 오천석, 이기붕, 서은숙, 박마리아 등이다. 오천석에 의하면 애국의 마음으로 열띤 공연을 했다는 것이다.
1942년 5월 27일 뉴욕시 타운홀에서 독립을 위한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사회는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가 사회를 맡았고 연사로는 이승만, 강용흘, 오웬 라티모어, 모리스 윌리암, 빈센트 신 등 저명인사들이었다. 김경의 아내인 김배세가 특창을 했다.
김배세는 이화여전을 거쳐 오하이오 오블린 대학과 일리노이 웨슬리안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으며 1940년도에 뉴욕에 거주, 뉴욕한인교회 성가대를 위해 봉사했다.
한인들의 워싱턴 궐기대회와 뉴욕궐기대회에 힘을 얻어 1942년 4월에 영자신문인 ‘자유한국’The Free Korea)이 교인들 중심으로 창간됐다.
교인들을 중심으로 창간된 자유한국
약 10회에 걸쳐 발행됐는데 주로 한국의 문제를 미국의 여론에 호소하며 미국이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과 국제연맹가입을 후원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미국 정치인들에게 한국의 문제를 주입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한 것이 사실이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었다.
해방되기까지 해외의 동포들이 얼마나 많은 재산,지식, 정열을 그리고 생명을 모두 바치었던가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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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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