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들려주는 ‘뉴욕지역 독립운동 발자취’ <9>
김준성 목사
▶ 김준성 목사, 공병우와 함께 타자기 개발 국내 보급
▶ 영자지 ‘자유한국’ 2호부터 뉴욕한인교회서 발간
▶ 미 정치인·저명인사들에 배포해 해방운동에 이바지
■ 영자신문과 김준성 목사
영자신문 The Free Korea “자유 한국” 신문은 2호 부터 뉴욕한인교회에서 발간됐다.
그때 프린스턴 신학대학에 재학중이던 김준성이 임창영에 이어 5대 목사로 부임하면서 자유한국신문은 교회에서 발간하게 된 것이다. 1941년도이다.
이 신문의 창간은 뉴욕한인교회 교인인 정기원 박사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해 철학 박사학위 취득까지 줄곧 프린스턴 대학에 있으면서 북미 유학생 총회 산하 프린스턴지역 회장을 역임했고 프린스턴 대학의 도서관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애국의 사명감에서 ‘자유한국’이라는 신문을 발간할 때 영어에 능통한 김준성에게 주필을 맡긴 것이다.
신문은 3개월 간격으로 10회까지 발간되었는데 김준성 목사에 의하면 신문이라기보다 월간지 성격을 띠고 매번 3000부씩 발간했다.
미국정부 요소와 국회의원 그리고 저명인사,정치인들에게 배포해 대한의 독립과 해방운동에 이바지했다고 한다. 김 목사는 약 3년간 교회를 담임했다.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페인트롤러를 처음으로 개발해 예배당 수리와 페인팅에 사용했다.
언더우드사와 합작해 제작한 타자기
그는 타자기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1920년 뉴욕한인교회 교인이었던 이원식이 발명했으나 생산은 하지 못했고 이것을 송기주 교인이 뒤를 이어 언더우드 회사와 합작하여 제작에 성공했다.
그러나 제작비가 비싸 판매에 이르지 못하고 있을 때 김준성 목사가 지금의 타자기 형태를 완성시켰고 공병우와 같이 개발하여 상품가치를 높이고 공병우 타자기라는 이름을 붙여 널리 국내에 보급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타자기가 뉴욕한인교회 발명품이 된 것이다.
또한 영어실력이 뛰어난 김준성 목사는 1944년 애국가를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하여 뉴욕일원에 배포했다. 그 한장이 뉴욕한인회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 동포사회에도 큰 공헌
김준성 (John Starr Kim ) 목사는 1900년 3월 3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났다.
단천은 이동휘를 비롯한 많은 애국자들을 배출한 곳이다. 10세때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김 목사는 교회에 다닌 이유를 첫째는 복음이요 둘째는 애국의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고향을 떠나 경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그해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운동에 가담했다. 그때 일본 경찰에 잡혀 몇 개월 옥고를 치르고 다시 경신 학교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다가 1923년 일본 동양대학에 입학했다.
일년을 공부하고 일본대학으로 전학하여 공부할 때 교원자격시험에 합격해 교사자격증을 취득하고 졸업했다. 귀국해 원산 YMCA 총무로 활동하면서 3년제 청운학원을 설립하고 덴마크식의 협동조합을 창설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보신여자고등보통학교, 보흥여자고등보통학교, 영생고보 등 만주의 학교에서도 가르친 바있다.
이즈음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했다. 이때 기독학생들을 규합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 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YMCA 총무로 1년간 활동하다가 다시 귀국해 함흥의 영생고등학교 교사 겸 학감으로 1931년까지 봉직했다.
이 학교는 1930년 뉴욕한인교회 교인으로 있으면서 뉴욕대학 교수로 있었던 강용흘이 졸업한 학교다.
이 당시 함흥에는 조선공산당 본부가 설립되어 지하조직을 통한 공산당운동이 한참인 때였다. 철저한 기독교인인 김준성은 이에 맞서 반공교육을 실시하며 공산당과 맞서 싸웠다. 1934년 그는 캐나다 선교부 주선으로 토론토 엠마뉴엘 신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후 미국으로 건너와 1939년 프린스턴 신학을 졸업하고 다시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했다. 다시 보스턴대학 수학 일년후 드류 대학으로 와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
이때 1945년 초까지 3년간의 목회를 했으나 교회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동포사회에 국위선양운동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미 동부지역 일대 김 목사가 미치는 곳에는 한국의 윷놀이와 연날리기를 미국사회에 알리며 심지어는 손수 제작한 윷과 연을 만들어 판매도 했으나 오히려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그는 교회와 계속 연관을 갖고 뉴욕한인교회에서 뉴욕한인회가 재건될 때 한인회 재건 창립위원으로 활약했고 그후 한인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어 한인회를 위해 많은 봉사를 했다.
1940년 부터 1970년까지 김 목사의 영향은 지대했다. 한인회를 중심으로 유학생회, 기독교단체 등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가 창립한 자메이카 롱아일랜드 한인교회(1956년)에서 교회생활을 계속하면서 1971년 한인 동포들을 위해 뉴저지에 한인공동묘지를 마련했다. 퀸즈 한인교회가 관리하고 있는 무궁화 묘지이다. 뉴저지 말보로 타운에 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한글 타자기로 4년간 “뉴욕한인소식”을 발행하기도 했다. 뉴욕의 동포들을 자기 식구처럼 돌보며 계속 한인회에 관심을 가지고 봉사했다.
그의 말년은 브롱스의 빈민가에서 외롭게 살다가 그의 나이 78세인 1978년 9월 21일 별세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났다. 고향에 아내와 3남 1녀가 있다. 1934년 캐나다 유학을 떠날 때 헤어진 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주위에서 재혼을 권유받았으나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거절했다.
무궁화동산에 외롭게 묻혀있는 고인의 무덤을 찾아 가족대신 저희들이 성묘하며 그분의 뜻을 되새기게 될 날을 기대한다.
■뉴욕한인회 창립
조병옥의 ‘나의회고록’에 의하면 뉴욕에서 처음으로 한인회를 조직하고 자신이 총무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1918년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학생으로 있을 때 1919년 3.1운동을 맞았고 쿰버랜드 여사와 1922년 3.1운동 행사를 뉴욕에서 주도할 만큼 학생과 동포들을 동원한 것을 보면 이사이에 한인회 조직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 한인회는 미국인도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후에 안정수를 중심한 교민단이 1924년 조직되었으나 이승만을 위한 정치적 성향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한인들로 구성된 점으로 보아 한인회 성격을 띤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949년도에는 뉴욕에 총영사관이 설립되어 남궁염이 총영사로 있을 때 그가 한인회 회장으로, 최용민 교민 담당 영사가 부회장으로 한인회 모임을 뉴욕한인교회에서 가졌다.
그후 1951년 3월에는 이원순이 한인회장으로 선출됐고 이듬해 미국의 소리방송을 맡았던 민재호가 회장을 맡았다. 이때의 한인회 활동을 보면 미약하였다. 그러나 1960년 초, 한인회 재건 조직부터는 규모나 활동에 있어서 전례를 찾기힘든 상당한 것이었다.
이때 발기인을 보면 뉴욕한인교회에서 주일예배후 강한모, 김준성, 윤치창,김형린, 서상복, 홍윤식, 송현구 등 교인들이었다. 이들은 3인 강한모, 송현구, 김준성을 선정해 한인들의 명단을 수집하고 한인회 규칙을 초안했다.
뉴욕한인회 발기인. 왼쪽부터 서상복, 강한모, 김형린, 윤치창
1960년 5월 22일 주일예배후 뉴욕한인교회에서 규칙초안을 심사한 후 6월 12일 창립총회 날짜를 결정했다. 그날 40여명의 동포들이 참석했는데 서상복이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때부터 한국정부와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인회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년후 2대 회장에는 뉴욕한인교회 강한모 교인이 선출됐다. 그는 강용흘의 조카다. 이때의 튼튼한 조직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김준성 목사가 잠들어 있는 무궁화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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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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