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들려주는 ‘뉴욕지역 독립운동 발자취’ <10>
■ 컬럼비아 유학생 중심 ‘재미조선문화회’ 창립
1931년 12월 13일 유학생들이 뉴욕한인교회에서 재미 조선문화회를 조직했다.
이는 새로운 애국운동의 업적이었다. 그 시대 새로운 애국운동의 다양성과 방향을 제시해 준 조선문화회는 모국의 반만년 역사적 전통과 얼을 찾고 보존, 계승하여 조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먼저하여야 할 애국의 기초적 운동이라 본 것이다.
컬럼비아 대학 유학생들을 중심한 한국 유학생들이 신학문에 매진하면서도 애국활동을 하는 방향을 나름대로 찾은 것이다.
이들은 뉴욕과 워싱턴DC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국자들을 눈여겨보았다.
나름대로 외교활동을 펼치며 집회를 통하여 선언문을 발표하여 대한독립을 미 주류사회에 알리거나 군사조직, 임시정부와 독립군 지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애국활동을 했다.
그러나 의견 불일치 또는 이념과 사상의 갈등으로 불화를 겪으며 흩어져 결국 각자 노선을 따라 애국활동을 하는 미약한 모습을 보기도 했다.
우남(이승만)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격언이 이때 체험을 고백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때에 신학문에 열중하던 젊은이들이 나름대로의 애국의 길을 찾은 것이 ‘재미조선문화회’ 창립이다.
대부분이 뉴욕한인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컬럼비아대 유학생들을 주축으로 동부지역과 시카고 지역까지 폭을 넓혀 뉴욕한인교회에서 발기대회와 총회를 개최했다.
■“우리의 문화적 보고 세계에 알리고자” 발기 취지
다음과 같은 발기 취지서에서 그들의 정신과 뜻을 볼 수 있다. 후대에 남겨준 귀한 유산이다.
“재미조선문화회발기취지서”
우리는 사천여년의 문화를 가졌다. 우리의 선조는 동양문명의 주인공이요 우리의 고국은 예의지방으로 타민족의 경모를 받았다.
우리에게는 원효와 퇴계와 같은 대철학가도 있었고, 율곡과 광암같은 대정치가도 있었고, 연암과 다산과 같은 대학자도 있었고, 서포와 춘택 같은 대소설가도 있었고, (초)정과 (황일산)같은 대시인도 있었다.
우리의 가극은 동양연예의 시조이요, 우리의 주자는 세계활판의 선도이었다. 솔거의 그림에 조작이 춤을 추고 고운의 양문에 간신의 간담이 서늘하였다.
이충무의 귀선,고려의 자기, 법륭사의 관음상, 경주의 천문대, 이조의 측우기, 세종의 훈민정음,황용사의 구층탑, 김생의 필법, 우륵의 가야금, 무엇이 우리의 천재를 발휘함이 아니며 무엇이 우리 문화의 결정체가 아닌가, 이와같이 무수 무진장한 문화적 보고를 가지고 이와같이 휘황찬란한 예술의 역사를 가진 조선은 희랍이나 로마와 같이 전 세계 문명의 일대동량이며 일대초석인 것이 무단하다.
-중약- 우리가 가진 보물을 세계문화의 대무대에 선전하며 소개하여야 되겠다.
-중약- 우리에 관한 내외서적을 모집하는 동시에 우리학생들을 위하여 연구의 재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한국도서관의 책임자로 일했던 이철원. 재미 조선문화회 회장 윤흥섭
이날 총회에서는 뉴욕지역 회장 윤흥섭, 서기 이철원 모두 컬럼비아대 재학생이다.
이사는 윤병구 목사, 윤흥섭, 이철원, 황창하, 노재명, 홍득수, 안정수, 장석영, 정태진, 김도연 그리고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LA 등에서 참가한 지역대표들인 윤성순, 염광섭, 김경, 김홍기, 홍언, 안석중 등이다.
회장 윤흥섭은 순종황제의 계비 윤비의 오빠로 뉴욕한인교회 세례교인이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부 졸업후 오리건 대학 졸업,1926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1935년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도서관위원회를 창설한 사람의 한분이다.
1935년 한국으로 떠날 때 뉴욕한인교회에서 송별회를 가졌다.
귀국 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고 참의원 의원직 권고의 회유를 물리치고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애국운동을 끝까지 펼친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서기를 맡은 이철원은 충남 보령이 고향이며 1917년 서울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독실한 교인으로 1920년도에 도미, 뉴욕의 1920년도와 1930년도에 YMCA 간사로 봉사하며 1929년 컬럼비아대에서 저널리즘과 심리학을 전공했고 컬럼비아대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있으면서 북미총학생회 사무총장(1933-35)을 역임했다.
교회에서도 많은 봉사를 했다. 해방 후 공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32년 한국도서관이 설치된 컬럼비아대학 건물
■컬럼비아 한국 도서관 10만여권 소장
재미조선문화회에서는 일차 사업으로 한국도서관 설립을 위해 한국서적 모집을 전국에 알렸다. 마침 이철원이 컬럼비아대학 사서로 있기에 도서관 관장과 직원의 도움을 힘입어 컬럼비아 대학내에 한국도서부를 설치하게 됐다.
한국도서 수집은 활발히 움직여 LA의 신한민보와 한국의 동아일보에도 기사가 나감으로 국내외에서 많은 한국서적이 기증되었다. 뉴욕에서 1년 동안 1.000여권의 책이 수집됐고 연말에는 미 전역에서 1,000여권의 책이 기증됐다.
1936년까지 2만5,000권~3만권의 한국서적 수집을 목표로 세우게 되었다.
대부분의 책은 한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책이며 정한경, 신흥우의 저서,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의 근대 문학인들의 책들도 있고 특히 헐버트, 알렌,아펜젤러, 언더우드, 게일, 그레이브즈 등 선교사들이 기록한 한국에 대한 저술들이 있다.
물론 서재필이 주필을 맡은 코리아 리뷰, 유학생총회 발간인 우라키, The Korea Bulletin 등도 보관돼 있다.
1952년부터는 대학 예산안에 한국도서관에 대한 예산이 따로 설정되었고 한국도서를 위해 한국인 한명을 사서로 두는 전통을 세우게 됐다. 역대 한국인 사서로 이철원에 이어 김주봉(국회도서관장 역임), 채형석, 이해경, 이효경, 신희숙(현재)이르고 있다.
이해경 공주
의친왕의 딸인 이해경 공주에 의하면 1973년 자신이 카네기홀 독창회를 마지막으로 성악가의 꿈을 접었을 때 컬럼비아대학 사서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약 10만권의 한국서적이 있었고 그때 각 분야별로 도서가 정리되었다고 회고한다.
20여년 이상 근무한 공주는 당시 대학에서 제공한 대학근처 대학 아파트에 50여년 이상 살고 있으며 뉴욕한인교회 교인으로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교회출석을 하고있다.
미국내 컬럼비아 한국 도서관은 한국서적 순위로 4번째이다. 워싱턴DC 의회 도서관, 하버드, 버클리대, 다음이다.
90여 년 전 애국운동의 일환으로 발기한 조선 문화의 첫 사업으로 시작된 한국도서관 설립이 지금 어엿이 세계굴지의 한국학 연구의 자료를 남겨놓아 컬럼비아대학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 우리들은 수많은 애국자들이 모두 떠나 만나 볼 수 없게 되었으나 100여 년 전 한국 유학생들이 남겨놓은 애국의 발자취와 그들을 지금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10여 만 권의 책을 모아놓은 컬럼비아대학 한국도서 때문이다.
<
장철우/목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