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들려주는 ‘뉴욕지역 독립운동 발자취’ <12>
100세 생일을 맞았을 당시의 임길재 박사
■ 임길재 박사
한인 최초로 1960년 퀸즈 플러싱에 산부인과 병원 개업
양로원 가면서 자신이 살던 집 정리해 이화재단에 기증
■ 한승인 장로
일본관동대지진 한국인 참살 최초로 신문에 폭로
뉴욕흥사단운동 시작 젊은이들에 애국훈련 시도
깡통팔아 장학기금 설립·한국농촌 송아지 보내기 운동 등 전개
▶알려지지 않은 애국자들
알려진 애국자들도 중요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애국자들을 찾았을 때 보람과 기쁨을 갖게 된다.
미 동부지역의 애국자들을 살피면서 꼭 소개하고 싶은 두 분을 알리고 싶다.
한승인 장로와 임길재 박사이다.
임길재 박사는 퀸즈 플러싱에 한인 최초로 1960년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하여 1986년까지 수많은 신생아, 특히 한국인 출산의 산파역할을 한 주인공이다.
■한국인 산파역할을 한 임길재 박사
1945년 의학박사까지 취득해 모든 자격을 갖추었으나 미국에서는 외국인에게 전문병원의 개업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1949년 미 국무부 최초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미했으나 개업까지 11년이라는 준비기간이 걸렸다.
임 박사는 1911년 2월 18일 경기도 안양에서 9남매중 7째로 태어났다.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거쳐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자격을 획득했다. 서울로 돌아와 서울의대에서 산부인과 인턴을 마치고 1945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 국무성 초청으로 도미후 1949년 미시간 대학과 브루클린 세인트 캐서린 병원에서 5년간 인턴과 레지던트를 마치고 존스 홉킨스대 펠우십을 수료했다.
그후 뉴욕 메디칼 대학에서 2년을 수학한 후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외국인에게 자격을 인정하지 않던 미국 의사협회와 정부에 수많은 항의와 노력 끝에 취득한 자격증이었다. 곧 플러싱에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하게 되었다.
뉴욕한인교회는 1958년 뉴욕으로 오면서 출석했다. 1960년부터 교회 재단이사를 맡아 10여년간 봉사했다. 평생 독신으로 교회를 가정처럼 여기며 교회자녀들을 사랑한 임길재 박사는 문학상을 교회내 설립하고(1981년) 어머니날에는 글짖기대회를 열어 어린이들에게 시상을 했다.
당시 교회가 협소해 재건축을 논의할 때인 30여년전 그는 본인이 살던 집을 팔아 마련한 13만달러의 거액을 교회에 모두 바쳤다. 뿐만 아니라 모교 이화대학을 위해서도 많은 후원금과 장학금을 기부했다.
양로원으로 가면서 살던 집을 정리할 때 모두 이화재단에 기증한 것으로 안다. 백수를 살면서 의사로, 교회 성도로 평생을 바친 임 박사는 빈손으로 세상에 태어나 빈손으로 하늘나라로 갔다.
그러나 그의 이름과 남긴 발자국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새겨지리라 믿는다. 교인들은 물론 뉴욕동포들이 잊지말아야할 어른이다.
노구의 몸을 이끌고 민주화 운동을 위해 시위에 나섰던 한승인 장로
■애국자이자 민주투사였던 한승인 장로
한승인은 1930년 9월 컬럼비아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뉴욕에 오면서 친구 오천석이 있는 뉴욕한인교회 교인이 된 것이다. 오천석은 컬럼비아 사범대학 재학중 교회 3층에 살고 있었다.
한승인은 친구와 한 방을 쓰게 됐다. 1930년대는 경제적으로 미국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한승인의 호는 용암이다. 그는 평남 강서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장티푸스로 부친과 조부 남동생들을 모두 잃었다.
15세 때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됐다. 다행히 안식교회를 다니면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의명학교에 다녔는데 선교사 자녀들을 돌보아 주는 조건으로 학비를 면제받았다. 졸업 후 1921년 일본 명치대학 상과에 입학했다.
재학중 1923년 9월 1일 일본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잘 알려진 대로 그때 일본인들은 원성을 한인에게 돌려 만나는 한인을 무조건 참살했다.
용암도 붙들려 죽기직전 같은 동네에 살던 일본인청년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즉시 귀국해 최초로 동아일보에 이 사실을 폭로했다. (1923년 9월 7일 신문기사)
그후 다시 동경으로가 1925년 5월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와 맺은 인연으로 송진우 사장이 써준 소개장을 가지고 김성수를 찾아가 그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1926년 도미후 노동으로 학비를 마련하고 1928년 미주리대학 졸업후 시카고대학과 노스웨스트 대학을 다녔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뉴욕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마케팅 전공으로, 1932년 8월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때의 교회생활은 생애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때였다고 회고한다. 특히 뉴욕한인교회 신앙생활을 통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친구들인 정일형, 김도연, 장덕수, 김마리아, 김활란 등 30여명은 형제와 같았다.
1년 후 1934년 한국 화신산업 중역으로 있다가 수양동우회(흥사단)에 연루되어 3개월 옥고를 치른 후 해방될 때까지(1945) 화신산업 중역으로 있었다.
미군정 때는 상공부 상역국장으로 재직했고 공직에 있으면서 1953년까지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가르쳤다. 그 후 미국무역회사의 한국지사 한국대표로 있다가 1961년 장면 정권 때 주불공사로 재직중 5.16쿠데타로 공사직을 사임하고 뉴욕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오게 됐다. 온 식구들과 더불어 이민생활이 시작이 된 것이다.
그는 곧 가발도매업을 시작했고 당시 교회어른으로서 많은 일을 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애국훈련을 시도하면서 뉴욕 흥사단운동을 시작했다. 손수 도산 안창호 전기를 발행하고 젊은이 중심의 아카데미조직을 활성화 시켰다. 그때 훈련을 받은 젊은이들이 뉴욕흥사단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고 있다.
계속해서 임창영 박사가 발간한 ‘국민의 음성’에 기고해 인권운동에 대한 바른 진로를 보여주었다. 그는 행동하는 인권주의자요,민주투사였다. 독재에 대한 항거와 민주화운동을 위해 85세 노구임에도 삭발은 물론, 띠를 두르고 워싱턴 DC 까지 달려가 시위했다.
그는 교회내에 목요기도회를 1975년 6월에 시작했다. 나라를 위한 기도회이자 참다운 민주화실현을 위한 기도회였다. 많은 애국인사들이 참여해 조국의 장래를 위해 기도했다. 본교회 교인은 물론 뉴욕일원의 의식있는 인사들의 중심 모임이기도 했다.
용암은 참다운 민주화운동의 길을 뉴욕동포들에게 보여준 선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새벽에 교회에 나와 기도들이고 대학가를 돌며 깡통을 수집하여 팔아 1만여달러 이상을 모아 교회내 한승인 장학기금을 설립해(1981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1975년 11월 한승인 장로 중심으로 연로한 교인들이 모금하여 한국농촌에 송아지 보내기운동을 시작해 매년 3,000여달러를 한국에 10여년 간 송금했다.
임길재 박사와 한승인 장로 이 두분은 아직 국가보훈처 애국자로 기록이 되어있지 않다.
이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애국자들이 얼마나 많을지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일은 바다에서 진주를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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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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