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만난 ‘애국지사 후손들’ ① 이해경 왕녀와 의친왕
이해경 왕녀의 2019년 모습, 의친왕비 묘소 이전후 한자리에 모인 의친왕의 후손들.
■ 1959년 뉴욕 도착후 뉴욕한인교회서 신앙생활
■ 30년간 컬럼비아대 도서관 사서로 한국학 연구에도 공헌
■ 방치 돼있던 의친왕비 묘소 이장이 생애 가장 큰 보람
■ 일 제국에 당당히 맞섰던 왕세자 의친왕 미국서 6년간 유학생활
이해경 왕녀의 아버지는 의친왕이다. 의친왕은 고종황제의 둘째아들로 그 형이 마지막 융희황제인 순종이다.
동생은 영친왕이고 여동생으로 덕혜옹주가 있다.
융희황제는 후손이 없고 영친왕은 이구 외아들을, 의친왕은 12남 9녀를 두었다. 이해경 왕녀는 의친왕의 다섯째 딸이다.
■후사 없던 왕비 밑에서 자란 왕녀
1959년 뉴욕에 도착한 이해경 왕녀는 뉴욕한인교회에서 바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왕녀는 경기여고와 이화대학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1956년 성악 전공을 위해 도미했다.
텍사스주 침례교 대학인 메리하딘 베일러 대학의 전액 장학금을 받고 3년만에 무사히 졸업했다.
훌륭한 성악가의 꿈을 안고 뉴욕으로 온 그는 초기에는 유명한 스승들을 만나 개인지도를 받았으나 레슨비와 뉴욕의 비싼 생활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유치원 선생으로 1969년 영주권을 받은 후 컬럼비아 대학 도서관 사서로 취직했다. 한국에서 미8군 도서관 직원으로 있었던 경력이 유효했다. 1973년 카네기홀 리사이틀홀에서 가진 독창회를 마지막으로 성악가로서의 꿈을 접었다.
거의 30여년간 컬럼비아대 도서관 사서로 있으면서 10여만권 이상되는 한국도서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한국학연구에 이 도서들이 많은 도움을 주어 보람을 느끼며 이 또한 애국의 길인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뉴욕한인교회는 1961년도에 현재 살고 있는 컬럼비아대학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교회와 가깝기도 하지만 그의 스승이었던 김활란, 김자경 선생이 다녀갔고 저명한 인사들이 있었던 이유로 출석하게 됐다.
1980년 주일 어느 날 교회를 가는 길에 노상강도를 만나 위험에 처했던 일로 교회출석을 잘 못하고 있을 때 이러한 사실을 안 필자는 2016년부터 왕녀를 모시고 교회에 가게 됐다. 일주일에 한번 어른을 모시는 것 또한 애국의 실천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왕녀의 몸가짐, 말씀 등이 다른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고상한 인품을 느끼게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왕녀가 가진 애국심이었다. 왕녀는 태어난 지 3년만에 후사가 없었던 왕비의 궁에서 자랐다.
친모와의 생활은 한국동란 이후 몇 년 뿐이었고 지밀(왕과 왕비의 처소) 어머니인 왕비 밑에서 자랐기에 왕궁의 예의와 법도가 배어 있었다. 필자는 노후에 스승을 모신 느낌이다. 참다운 애국의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다.
■“20여년만의 첫 모국방문”
왕녀는 생모(김근덕 여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1975년 19년만에 모국을 찾았다.
병실로 가기 전 어른들의 묘를 먼저 찾았다. 자랄 때는 몰랐으나 애국에 불타던 아버지, 자기를 유학 때까지 키워준 왕후 지밀 어머니를 먼저 찾고 싶었던 것이다. 두분이 누워 계시는 홍유능을 찾았을 때 왕녀는 실신하다 싶이 큰 충격을 받았다.
돌보지 않아 방치된 왕후의 묘를 보았을 때 그는 비분의 눈물을 흘렸다고 그의 수기 ‘마지막 황실의 추억’에 기록하고 있다. 평생을 홀로 살다 싶이한 지밀어머니가 하던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지금은 혼자 있으나 세상 떠난 후에는 영구히 나와 같이 있을 것이야(합장)”라 말하며 손수 위로를 받곤 했다는 것이다. 20여명이 넘는 형제와 문중은 무엇을 했던가, 그러나 왕녀는 조금도 원망치 않고 생모의 병실을 찾은 후 바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부터 열심히 일했다.
시간이외 근무도 마다치 않고 일하며 돈을 저축했다.
저축한 1만달러의 돈을 가지고 10여년만에 귀국했다. 문화재 관리국에 이장허가를 신청했으나 너무 복잡하고 시일이 많이 걸렸다.
더욱이 1만달러를 가지고는 이장과 석상, 석물준비에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가난한 친지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왕비의 친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왕녀는 그때의 어려움은 자기생애에 가장 잊을수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드디어 1996년 11월 29일 아버지 의친왕과 왕비 지밀어머님을 합장하여 금곡능에 왕능답게 모실 수 있었다. 생애에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애국이 무엇인가, 진정한 애국의 모습을 이해경 왕녀의 효심에서 볼 수 있다. 12남 9녀중 다섯째 딸, 이해경 왕녀의 노력, 그것은 왕가의 존엄을 지킨 것 뿐 아니라 나라사랑의 열정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애국심이 어디서 온 것일가, 그것은 조부인 고종황제로 부터,그리고 부친 의친왕으로 부터 물려받은 애국혼이라 믿는다.
■의친왕, 미 유학 후에도 국외애국자들과 연락
고종황제는 끝까지 을사늑약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의친왕을 파리 세계평화회의에 보내어 일본제국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대한제국회복의 기회를 삼으려고 했다.
1911년 상해로 탈출을 시도했던 의친왕은 만주 안동역에서 일본 형사들에게 붙잡혀 실패하고 말았다. 의친왕은 1899년 미국 유학시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과 버지니아주 로아노크대학에서 수학할 때 김규식은 그의 동문이었고 하란사는 웨슬리안의 동문이었다.
미국 유학때 애국자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김규식과 같이 LA를 방문했을 때 도산 안창호를 만나 애국성금을 도산에게 하사 하기도 했다. 유학 6년을 마치고 1905년 귀국하고서도 비밀리에 국외 애국자들과 연락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친왕을 양영대군에 비유하기도하고 방랑자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실은 철통같은 애국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일본 총독들의 간악한 회유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
어디서나 일본제국에 당당히 맞서는 왕세자의 모습을 끝까지 보여 주었다. 더욱이 황제의 붕어는 독살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대한독립을 위해 탈출할 기회만을 보고 있었다. 의친왕은 나라의 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하여 끝까지 몸부림 쳤다.
어느 날 일본총독을 만났을 때 너무 원통해하며 주먹으로 방바닥을 계속 내리쳐 손목이 상한적도 있다고 한다.
항시 탈출 기회를 노렸으나 일본 형사의 감시에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애국의 줄기찬 정신과 얼은 일본제국이 뺏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애국혼을 이어받은 어른이 그의 다섯째 딸인 이해경 왕녀다.
1930년생인 그는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아침마다 보건체조를 하며 주일마다 교회를 나간다.
황실 애국의 혼을 가지고 또한 500여년 조선역사의 전통을 지닌 이해경 왕녀가 우리들 곁에 있다는 것은 너무도 가슴 뿌듯한 보람이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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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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