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만난 ‘애국지사 후손들’ ② “김현경 장군과 김평겸”
강화 광성보 내 순절묘단 정면. [출처=한국학 중앙연구원 김광섭]
▶ 고조부 김현경, 전투엔 패했지만 한국인 투지력 세계에 알려
▶ 증조부 김규랑, 아펜젤러 선교사 만나 초대 전도사 임명
강화 광성보 쌍충비각. [출처=한국학 중앙연구원 김광섭]
■ 강화도 수비군 사령관이었던 고조부 김현경 장군
뉴욕한인교회 김평겸 장로의 고조할아버지는 강화도 수비군 사령관 천종 김현경 장군이었다. 신미양요라고 일컫는 미국과의 전쟁이 1871년 (고종 8년) 4월 23일 미군함대의 강화도 침입으로 시작됐다.
셔만호 사건이후 2번째의 침입이다. 이번 침입의 이유는 셔만호 침몰의 배상과 통상이 이유였다. 미해군 블레이크 함장 지휘하에 모노카시함과 팔로스함 그리고 증기선 4척, 단정 20척을 이끌고 병력 759명,그중 105명이 해병대원이었다. 10개의 보병대와 7문의 포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모노카시함에는 9인치 포가 증원되어 있었다. 무장과 위세가 대단했다.
24일 새벽 미군은 해병대를 앞세워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함대의 엄호 포격하에 킴벌레이 중령이 인솔한 400여명의 미군이 쉽게 조선군 포대를 점령했다. 당시 조선군의 화력은 미군에 비해 10분의 1도 안되었다. 계속해서 덕진진을 함락하고 광성진(광성보)에 도달했다.
광성보에는 황제의 어명을 받은 어재연 진무중군 총사령관이 600여명의 군인과 수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왕도 수비군과 평안도 포수군 그리고 천종 김현경 현지 사령관이 이끄는 군인들이었다.
사정거리에 맞추어 정박해있는 미 함대에서는 광성보에 함포와 박격포로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강화도에 배치되어있는 조선군의 포는 미 함대에 미치지 못하고 바닷물에 떨어졌다. 성벽을 깨고 쳐들어간 미군과 아군사이에 백병전이 벌어졌다. 미군의 강한 총검을 당할 수가 없었다.
실록에 의하면 창검이 부러져 돌멩이와 모래를 뿌리며 전투에 임한 조선군은 부러진 칼로 자결하며 바다에 뛰어들어 목숨을 던졌다는 것이다. 어재연 장군도 동생과 같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으며 천종 김현경 장군도 적의 총에 맞아 순직했다.
이날 전투는 조선군의 처참한 패배였다.
전투가 끝나고 시신을 수습할 때 어재연 장군과 동생 어재순을 흙구덩이에서 찾아냈고 천종 김현경은 총에 맞아 성벽에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 한국인의 강한 애국정신과 투지력
살아남은 별무사 이학성이 임금께 아뢰기를 “천종 김현경, 박치성은 평소에도 죽음 알기를 집에 돌아가는 것같이 여겼으며 최후까지 백병전을 치루며 전사하였다”고 아뢰었다.
황제는 이들을 증직케하며 사당을 지어 묘소를 영구히 보존토록 했다.
김현경 장군도 아들 규랑이 아버지 장례를 치러 사당에 모셨다. 아들도 무관의 벼슬을 받고 동학란을 진압하러 충청도에 내려가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내옆구리에 총알이 박혀있다”고 했다.
그는 강화도로 달려가 아버지 무덤을 헤치고 옆구리를 살폈더니 총알이 박혀 있었다. 다시 시신을 수습해 매장했다는 것이다. 천종 김현경은 젊은 나이에 무술이 출중하여 과거 무과에 급제 하여 고향인 강화도 위수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치안과 수비에 공이 인정되어 정 3품 무관으로 20여년 이상을 봉직해오다가 순국한 것이다.
뉴욕 헤럴드지는 한국과의 작은 48시간의 전쟁을 보도하며 미국이 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외교에서는 실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대원군의 쇄국정치를 비난한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인의 강한 애국정신과 그 투지력에 세계는 놀랐다.
6월 27일 전쟁에 참가했던 틸튼 대위는 자기 아내에게 편지하기를 우리는 모두 견디기 어렵도록 지쳐있으며 하루바삐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고 했다. 95회 독립기념일을 하루 앞둔 7월 3일 군함은 철수하고 중국으로 향했다.
■증조부 김규랑 목회자 길로
김 장군의 아들 김규랑은 아버지의 사당을 지키며 강화도에 정착했는데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인천항구에 부활주일에 도착해 3개월 후인 7월 29일 첫 선교사역을 시작하며 세운 교회가 인천 내리교회이다. 김규랑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나라에서 기독교를 전파하기위해 교회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와 적개심에서 교회를 찾아갔다.
어찌된 일인가 선교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분노가 일시에 사라지고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돌변했다. 성령의 역사였다. 사도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경험과 흡사한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원수를 갚으러 갔던 사람이 친구로 변했다.
그날부터 교인이 된 것은 물론 충성스러운 선교사의 오른팔이 되었다. 선교차 교회를 비울때는 김규랑 증조부가 교회를 돌보게 되어 초대 전도사의 임명을 받았다. 신학교가 없던 때라 목사안수는 받지 못하였으나 실상은 내리교회를 돌보는 목회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김규랑의 증손자가 뉴욕한인교회를 50여년 지키고 있는 김평겸 장로이다. 그의 할아버지 김종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로가 되었는데 부평의 논밭을 기증하여 현재의 부광교회를 설립하였다. 한국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로 손꼽히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김평겸 장로
■김평겸 장로와 그 아들 재훈
김평겸 장로는 1971년부터 뉴욕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그가 청년회장 때 만난 이화옥 권사를 만나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재호는 의학을 전공했고 둘째 아들 재훈은 경제학을 전공해 맨하탄 월드트레이드 센터에 있는 굴지의 무역회사에서 근무했다.
재훈군은 애석하게도 2001년 9.11일 테러로 희생을 당했다. 앤드류 재훈군은 신앙이 좋은 청년으로 아버지를 닮아 음악을 좋아해 언제나 교회 찬양을 인도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훈군이 치던 피아노가 그의 방에 보관되어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을 기념하는 장학재단을 설립해 지금까지 200여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특히 뉴욕한인교회 전도사들과 음대생들이 많은 혜택을 받았다.
재훈군은 이 세상에 없어도 자기의 할일을 다하고 있다. 그것도 보통사람들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오랫동안 살고 있는 동네 도서관 가는 길의 이름이 앤드류 웨이로 되어있고, 동네 오버펙 테니스 코트 6개는 그의 이름으로 국제경기의 규모로 설치돼 있다.
그가 고등학교 시절 테니스 선수로 있었기 때문이다. 김평겸 장로는 그 입구에 아들을 기념하는 조그만 꽃밭을 조성하고 아들의 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필자도 9월 11일이 되면 조화를 들고 매년 참배하고 있다. 아버지 김평겸 장로는 다시는 이런 참상이 재현되지 말아야한다고 하면서 아들의 희생이 지구상의 영구한 평화를 이룩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기도드린다고 한다.
필자는 그 뜻을 받들어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재훈군과 9.11 희생자 2,600여명의 영전에 바친다.
장철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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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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