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에밀 길레스의 피아노 연주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들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과연 하나의 음악에 이처럼 많은 표정들이 담겨질 수 있을까? 조용하면서도 격정적인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이중주도 멋진 연주였지만, 음악을 표현하는 연주자의 솜씨 또한 이 세상 음악이 아니었다. 과연 어느 정도 음악을 연마해야 그같은 음악성을 과시할 수 있을까?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특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피아니스트의 정교한 손놀림 때문이었을까, 새삼 음악이 주는 특별성에 많은 감동과 정신적인 치유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가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처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경우가 종종 있다. 곡이 너무 압도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곡 해석이나 작품성 등을 따지기에 앞서 그저 조용히 듣노라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만큼 감동으로 와닿는 경우도 없다. 특히 요즘처럼 팬데믹으로 우울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더욱 어울리는 음악이다. 사람들은 고독하거나 자신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조금 ‘업’되어있을 때보다는 조금 ‘다운’되어 있을 때, 쌩쌩 잘 나갈 때보다는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사람들은 오히려 인생의 진실을 보거나 삶의 진정한 빛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때가 있다.
밤하늘의 달빛 두 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은 서로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미묘한 쌍둥이 작품이었다. 이 두 곡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르며 또 다르면서도 서로 받혀주는 매우 아이러니한 관계의 작품들이었다. 먼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피아노 협주곡뿐 아니라 모든 클래식 음악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클래식 순위에서도 1위를 놓치는 법이 거의 없으며 미국에서도 탑 3위 안에 드는 인기곡 중의 인기곡이다. 반면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인기 순위는 80위로 처져 있지만 2번을 받혀주며 작품성에서 인정받고 있는 곡이다. 대중성에 있어서는 2번에 뒤처져 있지만 3번이야말로 음악성에 있어서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1순위로 꼽는 난곡이면서도 동시에 최고의 명곡으로 꼽히는 곡이다. 영화 ‘샤인’으로도 유명하며 ‘불멸의 명곡’, ‘미치지 않고서는 연주할 수 없는 곡’이라는 대사로도 유명하다. 이곡이 초연되었던 당시(1909년), 라흐마니노프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연주할 수 없는 곡이라는 악명을 얻었으며 21세기가 되기 전까지 피아니스트들의 역량과 재주를 뽐내기 위해 경쟁하듯 1순위로 연주됐던 난곡이기도 했다. 곡상으로 말하자면 2번이 더 붕 뜨는 듯한 낭만이 폭발적으로 밀려오지만 3번은 보다 차분하면서도 서정과 격정이 공존하고 있다.
나의 경우,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곡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꼽곤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 하나만 가지고도 역사에 그 이름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마치 창 밖의 빗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느낌이 들곤 한다. 후둑후둑 후두둑… 겨울 비를 맞으며 먼 길 떠나는 나그네처럼, 우울하지만 삶의 방랑이 이 한 곡에 모두 들어있는 것처럼 깊은 애수로 촉촉히 적셔 주는 곡이라고나 할까.
대중성에 있어서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인기가 훨씬 높지만 마니아 층에 있어서는 2번보다 3번이 훨씬 더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이 곡의 본질은 우울한 낭만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내면은 훨씬 더 복잡하다. 재차 말하면 이 곡은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클래식 순위에서 1위를 놓치지 않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도 클래식 순위 탑 3위를 놓치는 법이 없는 인기 곡 중의 인기곡이다. 그럼에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피아노 협주곡 3번’에 비하면 쓰레기(?)에 불과하다. 2번이 쓰레기이며 3번만이 우아하다는 뜻이 아니라 2번이 과장과 포퓰리즘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3번이야말로 진정으로 작곡가의 내면이 엿보이는 자신과의 투쟁, 일기로 쓰여진 음악이라는 뜻이다.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마치 사람의 사지를 마비시키는 선율의 마약이라고나 할까. 깊은 어둠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낯선 낭만… 그리고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비극적 염세주의…
21세기는 COVID-19 등 팬데믹으로 인해 삶의 불확실성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예전처럼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예측과 설계를 기반으로한 삶이란 더이상 지속될 수 없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불확실한 미래, 모호하지만 또 모호함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우리들을 더욱 깊은 영적인 방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19세기 세기말적인 현상으로 비관적인 예술이 탄생했듯 21세기에도 제 2의 퇴폐 사조가 닥치지 말란 법도 없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그 자체로 퇴폐 예술이라 규정할 수는 없지만 미묘하게 파노라마치는 선율적인 불안감이 묘하게 현대인의 심리를 파고들어 환상적 낭만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마치 대중 속의 고독이라고나할까. 어둡고 내면적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현대인의 가슴 속을 후벼파고, 우울한 매혹을 자극한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 여행을 위해 이 곡을 작곡, 1909년 뉴욕 심포니 소사이어티와의 협연으로 초연을 보았다. 처음에는 연주하기가 너무 까다로워 비평가들 사이의 혹평이 있었고 라흐마니노프 자신도 연주 후 왜 이런 곡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적인 감미로운 선율미가 점차 호평을 받았고 기교적인 까다로움도 마치 미녀와 야수같은 묘한 대비를 이루며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에게 아름다운(?) 도전을 안겨주었다. 명연주로 꼽히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밀 길레스, 유자 왕 등의 연주들이 유튜브에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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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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