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만난 ‘애국지사 후손들’ ③ 남강 이승훈과 주영빈
[출처=한민족 대백과사전]
▶ 오산학교 설립해 함석헌·장준하·김소월·황순원 등 배출
▶ 감리교회· 천도교·불교까지 통합해 독립만세운동 주도
▶ 외손자 주영빈도 근검절약 실천하며 교회·후세들 돕는일에 앞장
■평양일대 거부로 성장한 이승훈
삼월은 봄이 시작되는 달이다. 또한 민주주의 싹이 되었던 기미년 3.1절 대한독립만세운동이 터진 달이다. 반만년 역사 이래 군주정치에서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생명이 탄생하는 첫소리였다. 3.1절의 민족대표 33인을 떠올리면서 그중에도 중요한 한사람을 떠올리자면 단연 남강 이승훈이다.
남강은 평북 정주에서 1864년 3월 25일 태어났다. 태어난 지 8개월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9살 때 자신을 길러준 할머니와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5살 위인 형 이승무와 같이 고아가 된 것이다.
어린나이에 남강은 유기전 사환으로 들어가 많은 고생을 했으나 정직과 성실한 일군으로 인정돼 3년후 점원을 거쳐 판매원 겸 수금원의 책임을 맡는다. 15세 때 이도제의 딸 이강경과 결혼 후 보부상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다니며 유기 판매의 독점을 할정도로 성공한다.
이때 주인 임일권이 군수가 되면서 후계자 청원을 받으나 거절하고 독자적으로 유기공장을 세워 평양지점을 두고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1894년 청일 전쟁으로 회사와 공장문을 닫게 돼 무일푼 신세가 되나 오희순 거부로 부터 융자금을 지원받아 다시 재기한다.
1901년 경인선 개통과 더불어 서울에 상거래를 터, 사업을 확장해 거상으로 자리를 굳힌다. 그러나 또다시 1904년 노일전쟁으로 파산지경에 이르나 다시 사업을 일으킨다. 그동안 쌓아올렸던 신용이 그의 큰 재산이었다.
■오산학교·오산교회 설립
신용과 근면으로 거부가 된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진때 20대의 청년 도산 안창호의 만민공동회 쾌재정 연설에 감명을 받고 사재를 털어 강명의숙을 세우고 (학생 9명 선생 2명)오산학교로 발전해 어엿한 중등학교를 만들었다. 교육이 나라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전국을 망라하여 초기 여준, 서진순 이외 유영모, 이광수, 신채호, 조만식, 이종성 등 유명인사를 교사로 초빙했다. 후에 조만식에게 학교 인계를 하려고 했으나 일본 총독부의 거절로 성사가 안됐다. 그는 교장으로 있으면서 학교변소를 청소했다. 겨울철 변소의 배설물이 산더미처럼 쌓일 때 손수 도끼로 배설물을 제거하기도 했다.
오산 졸업생으로 유영모의 제자로 일컫는 함석헌을 비롯해 한경직, 이윤재, 백인제, 김홍일, 장준하, 김기석, 김소월, 백석, 이중섭, 황순원, 박현환, 주기철, 강영훈, 주기용 등 많은 인물들이 배출됐다.
1910년 한일합방 소식에 남강은 밤새 통곡하고 다음날 산정현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 그때 한석진 목사의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설교를 듣고 교인이 될 것을 결심하고 또다시 사재를 털어 오산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다가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해(1917) 수학하기도 했다.
1918년 동경 유학생 서춘이 오산에 들려 독립만세운동 거사를 남강과 의논하고 이는 조만식, 박현환, 여운형에게 까지 전달돼 이들은 독립만세 운동을 마음으로 준비해오고 있었다.
■ “민족을 본위로 하라, 죽기까지 심혈을 다하라”
1919년 2월 6일 상해 신한청년단 소속 선우혁은 양전백에게, 양전백은 이승훈에게. 이승훈은 길선주에게 독립만세 거사를 알리고 뜻을 세울 때 남강은 “비로서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좋아했다고한다.
남강은 서울에서 감리교회뿐만 아니라 천도교, 불교까지 망라한 독립만세운동의 거사를 주도했다. 통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라를 찾는 일에 종교,교파가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나라 없는 백성이 천국이 있다고 보는가” 그가 남긴 유명한 일화이다.
동분서주 통합에 성공한 남강이 있었기에 3.1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다.
남강은 1911년 105인 사건에 징역 6년, 3.1절 만세운동에 3년형을 언도받았다. 1922년 3년만에 가출옥으로 풀려났으나 일제의 고문과 극형에 그의 몸은 만신창의가 되고 학교는 일본 순경들이 불을 질러 잿더미가 되었으나 조만식 등 주위 동지들의 힘을 빌어 학교를 재건했다.
그는 1,000평의 땅을 기증해 공동제작제를 실시해 학교운영을 해나갔다. 일본 학교시찰 후 동지들과 민립대학 설립을 계획하기도 했고 서간도 독립군 기지를 건설해 일본군과 싸울 것도 구상해 실제 유지들의 도움도 청했다.
후에 김성수의 권면으로 1년 동안 동아일보 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의 평생 좌우명은 첫째 민족을 본위로 하라 둘째 죽기까지 심혈을 다하라 였다.
그는 말년에 나는 민족주의자였으나 감옥에서 성경을 40 여독한 후 세계주의자가 됐다. “일본을 미워한 것은 민족이 아니라 그들의 불의를 미워한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1930년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함석헌은 “남강은 자기를 태우는 민족의 촛불이요, 몸속의 핏줄중에도 대동맥이었다”고 회고 한다
그는 자신의 시신을 의학도의 연구용으로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외조부 애국혼 물려받은 주영빈
주영빈은 남강 큰딸의 맏아들이다. 3살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기억이 잘 나지 않으나 어머니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주영빈의 아버지는 조만식 뒤를 이은 오산학교 교장이었다.
함석헌과 주기용이 오산을 졸업하고 일본 동경사범학교를 졸업할 때 남강은 이들을 불러 오산학교 선생으로 세웠다. 함석헌은 국어, 역사를 주기용은 수학을 가르쳤다.
남강은 두 사람을 자기 딸의 신랑감으로 살폈다. 함석헌은 성격이 독특하여 딸이 고생할 것 같으나 주기용은 성품이 원만하고 신앙심도 좋아 결국 주기용을 사위로 삼았다는 것이다.
주기용은 순교한 주기철과 오산 동창이며 사촌형제이다. 주기용은 18대 교장으로 1953년 서울 보광동에 있는 현재 대지를 구입하고 교사기공식을 가졌다. 1961년 서관 기공식까지 하고 8년간의 교장직을 사임했으나 1962년 이사장직을 맡으며 학교일에 힘쓰다 과로로 1966년 5월 8일 서거했다.
필자가 뉴욕한인교회 담임시 2010년께 서울을 다녀온 주영빈 장로가 기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점심을 같이하며 “제가 이제야 빚을 다 갚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부친이 학교건축에 많은 빚을 졌는데 큰 아들인 본인이 책임을 지고 약 10년에 걸쳐 다 갚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친의 묘를 정해 유해를 아버지가 나가던 교회에 다 뿌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국을 떠나왔다는 것이다. 주영빈 장로는 홀로된 모친을 미국으로 모셔와 10여년간 돌아가실 때까지 효성을 다해 극진히 돌봤다.
건축헌금을 할 때 10만달러를 바쳤고 30여년간 건축위원장을 맡았고 2016년도에는 건축헌금 100만달러를 본인이 다 채웠다.
그는 한달에 두번씩 토요일에 청년들을 불러 손수 저녁을 마련해 친교실에서 음식을 나눌 정도로 청년들을 사랑했다.
아무도 모르게 젊은 청년들의 학비도 주었고 유명한 피아니스트에 그랜드피아노를 사주기도 했다. 그러나 감사의 카드 한 장 받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2010년부터 몸이 쇠약해졌다.
필자가 어느 날 심방을 가 그가 누워있는 침실을 처음 들어갔다. 침대를 붙들고 간절히 기도 드렸다. 내가 붙들고 있는 침대는 삐꺽 소리가 나는 나무침대였다. 50여년전 이사올 때 쓰던 나무침대였기에 삐꺽 소리가 났던 것이다.
교회를 위해 앞장서 헌신하고 바치던 분의 침대가 너무 초라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영빈 장로의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에 감복했다.
부인 허장원 권사는 금년 92세로 막내딸이 있는 뉴저지에서 살고 있다.
외할아버지의 애국혼과 아버지의 성실과 믿음을 그 손자, 아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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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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