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만난 ‘애국지사 후손들’ ④이두성 애국지사와 이신호
[뉴욕한인교회]
■ 누나따라 미국 온 후 자동차 정비기술 배운 이두성
■ 도산따라 상해로 간 후에도 정비사로 일하며 독립자금 후원
■ 한국인 최초 공중위생학 박사 김창세
■ “국민건강이 민족의 힘” 긍지 가지고 독립운동 활동
이두성(1888년 11월18일~1979년 2월 8일) 애국지사는 아들 재호, 태호와 딸 상호, 신호 등 2남2녀를 두었는데 막내딸인 이신호는 뉴욕한인교회 권사로 남편 소강석 권사와 같이 40여년간 교회를 지켜오고 있다. 소강석 권사는 뉴욕한인봉사센터KCS)에서 노인들을 위해 30여년간 봉사해오고 있는 숨은 공로자다.
■ 도산의 숨은 조력자 처남 이두성
이두성은 이혜련 여성독립운동가의 동생이자 도산 안창호의 처남이다. 도산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도움으로 1889년 8월 미국으로 유학올 예정이었으나 이혜련 약혼자가 학업을 위해 정신여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느라 2년을 보내고 누나와 같이 살던 처남 이두성의 여권수속으로 반년이 지나서야 1902년 도미하게 됐다.
14세에 미국에 온 이두성은 캘리포니아 클레멘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자동차 산업이 번성 할 때라 도산은 처남을 자동차 정비 기술을 연마하도록 정비사 수련을 시켰다. 일인일기의 인생철학을 갖고 있던 도산의 마땅한 처사다. 이두성은 생계를 위해 농업과 상업에도 종사했으나 자동차 정비가 그의 전문이 되었다.
도산이 한국으로 떠난 후 누님을 도와 가정살림을 도왔다. 세계1차대전이 일어나 미국이 참전했을 때 그는 미군에 입대하여 3년간 근무했다. 도산은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상해로 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두성도 1923년께 도산이 있는 상해로 갔다. 바로 상해 포드 자동차회사에 들어가 정비사로 일하면서 도산의 독립자금 후원과 미국의 누님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결혼할 엄두를 낼 수 없던 상황이었다.
■상해 포드자동차서 20년 근무
그는 나이 40세가 되어 20대의 김정덕과 결혼했다. 그는 상해 포드자동차 회사에 근무한지 약 20년이 되었을 때 해방을 맞았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4남매를 거느리고 귀국했다.
온가족과 흥사단 단우였던 송창근 목사가 시무하는 성남교회를 출석하며 군정청 용도과 부장, 화신산업,그리고 미국인 무역회사에서 15년간 근무하고 72세에 은퇴했다.
가끔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미국에 가자고 졸라댄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손바닥을 내보이며 “내 손바닥을 봐라, 딱성냥을 담벼락에 그어 불을 켜듯 손바닥에서도 불이 켜질 정도의 각오가 되어있으면 미국가서 살수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14세에 누님 이혜련(도산의 아내)여사를 따라 18년간 32세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과 수고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92세까지 장수하고 성남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품으로 갔다. 당시 딸 이신호와 형제들이 교회 집사였고 어머니는 그 교회 권사였다.
7년후 1986년 1월 16일 미망인 김정덕 권사도 77세 일기로 별세했다.
필자는 고인을 뵙지 못했으나 막내딸인 이신호 권사와 신앙생활을 같이하면서 그의 부친을 만나본 것 같다. 이신호, 소강석 부부는 만날 때마다 언제나 대화의 중심은 애국에 대한 것이었고 애국자들의 사진과 그들에 대한 비화를 간직하고 있다.
■도산 주치의이자 동서 김창세
여러 사진 중 김창세 애국지사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5남1녀의 사진이다. 아들 4형제는 2차대전때 미군장교로 근무했고 한국전쟁 때는 두형제가 참전했다.
이들은 모두 캘리포니아에 살았다. 도산의 아내 이혜련의 막내 여동생이 이정실이다.
이정실이 김창세의 아내이기에 김창세는 이신호의 고모부이고 도산과는 동서지간이다.
도산이 상해 독립운동을 할 때 도산의 주치의 역할을 했고 상해임시정부의 재정후원자였다.
그는 상해 홍십자 병원 외과의사로 명성이 높았다. 임시정부에 대한적십자회를 설립하고 병원을 운영하면서 부설 간호사 양성소를 설립했다.
김창세는 민족체력의 개선과 국민건강의 증진이 독립운동의 기초라고 보고 평생 국민건강에 힘썼다.
김창세는 평남 용강에서 1893년 출생해 집안이 일찍이 안식교인이었던 관계로 안식교 계통의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유학을 했고 세브란스의대를 졸업했다. 도미해 존홉킨스 의대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고. 1916년 상해로가 안식교 지원의 적십자의원에서 애국지사 환자와 가족들을 돌보게 되었다.
이때 도산을 만나 애국운동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1920년 3월 김용정, 이석, 전재순과 함께 흥사단에 입단했다.
1922년 도미해 LA에 가족을 남겨두고 라커펠러재단 공중보건분야의 권위자인 하이저 박사를 만나 공중위생학을 접하게 된다.
1925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공중위생학으로 보건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같은해 귀국해 모교 세브란스 의대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쳤다. 국민건강이 민족의 힘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수양동우회 의사부장을 맡아 민족적 육체 개조론을 제창하기도 했다.
■ 뉴욕 차이나 타운 위생국장 역임
1927년 위생교육활동과 독립운동의 절박성을 느끼고 다시 아내와 같이 상해로 이주한다. 그는 도산의 건강을 살피며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한편 중국 푸젠성 샤먼시 공중위생회 촉탁의사로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연구해오던 우유를 대체하는 콩에 대한 연구를 인정받아 1930년 2월 뉴욕국제의학회에서 우유대용 두유 사용에 대한 발표회 초청을 받고 뉴욕으로 왔다. 그때부터 뉴욕한인교회를 출석했다. 그는 뉴욕 차이나 타운 위생국장으로 취임해 중국인들의 위생과 건강을 돌보았다. 또한 맨하탄 보이스카우트 보건과장으로 청소년 건강을 위하여 봉사하기도 했다.
1932년 도산의 체포소식을 듣고 서재필과 함께 미 국무부, 검찰총장, 국무차관 등을 만나 도산의 석방운동을 주도했으나 일본인들의 방해로 이루지 못했다. 그는 계속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과 항저우 결핵병원을 위한 모금 운동을 위한 대중강연 등 애국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거주지는 맨하탄 하버드 클럽이었다.
1929년 검은 화요일로 알려진 월가 주식의 대폭락으로 시작된 유래 없었던 경제 대공황이 미국에 불어 닥치면서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맨하탄 거리에 집 없이 떠도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김창세는 뉴욕 55번가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1934년 3월 5일, 그는 친지들에게 마지막 유서를 남기고 41세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는 심각한 경제공황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타격을 받고 우울증에 빠져있었다. 이분의 자살도 우울증이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일설에는 일본인들의 공작으로 협박과 폭력의 위협에 시달려 우울증이 더 심각해졌다는 말도 있다. 한참 젊은 나이에 그토록 많은 의학공부를 해 세균학, 공중보건학 등 두개의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이며 애국지사였던 분을 잃은 것은 우리나라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고인의 무덤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고인의 무덤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식구들은 모두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고 교회에는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에게 맡겨진 숙제로 알고 계속 그의 무덤 찾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김창세 애국지사는 2001년도에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두성 애국지사는 아직 아무런 훈장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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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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