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만난 ‘애국지사 후손들’ ⑤ 김영윤 순교자와 김정식
독립운동가 김영윤 목사와 김신덕 사모.
■ 김영윤 목사, 교회 끝까지 지키려는 사명 감당하다
■ 북한 정치보위부에 체포돼 총살
■ 황해도 안악장로교회서 김홍량·김선량 등 배출
■ 장남 김정식 장로, 미국서 교수·의사로 봉사
뉴욕한인사회의 신사를 꼽으라면 단연 김정식 장로를 떠올릴 것이다.
그는 심장내과 의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임상교수였지만 어릴적부터 음악을 좋아해 서양 고전음악의 전문지식을 갖춰 음악평론도 전문가 수준이다.
뉴욕한인교회는 1958년부터 출석하고 있으며 2015년 지금의 부인을 따라 테네시주 차타누가로 이사했으나 지금까지 뉴욕한인교회에 적을 두고 있다.
김정식 장로는 뉴욕한인교회 창립 이래 1965년 첫 장로로 세워진 3인(이병두, 주영빈, 김정식) 중 한사람이다.
시무장로가 된지 4개월 후 테네시주 내쉬빌의 의과대학 교수가 되어 4년간 떠나있다가 뉴저지 주립의과대학 내과 교수와 이스트 오렌지 VA 메디칼 센터의 심장내과 과장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뉴저지로 와 계속 뉴욕한인교회에 시무장로로 봉사한 그는 40년 이상 교수와 의사로 살다 80세가 넘어 은퇴해 차타누가에 정착해 살고 있다.
■순교자 김영윤 목사
김정식 장로는 7남매중 맏이로 태어났다. 부친은 1950년 6.25 전쟁때 공산군에 잡혀 순교한 애국지사 김영윤 목사다.
김영윤 목사는 대구 시외 하양에서 출생했다. (1902)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계성중학에 입학해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그가 졸업반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급장이었기에 주동자 역할을 해 일본경찰의 체포 대상이 됐다.
일년을 숨어 지내다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걸어 한달여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그는 대동강을 건너려고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우연히 같이 배를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독립운동의 뜻을 밝히고 만주로 간다는 젊은이의 말을 들은 신사는 숭실학교를 추천하며 공부하라는 권고를 했다. 배움이 힘이요, 힘을 길러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설득에 감명을 받고 만주로 향하던 발걸음을 숭실중학으로 옮기게 됐다. 이분이 후에 장인이된 김영용 장로이다.
김영윤 목사는 1935년 숭실대학 화공과를 고학으로 졸업했다. 그때 한경직 목사와 한반에서 1,2등을 다투는 공부벌레로 평생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졸업후 평양에서 가장 큰 화학 공장에 지원해 입사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주일도 공장에 나와야 된다는 조건에 주일 성수를 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포기했다. 당시 한국인으로 그 회사의 직원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그는 남장로교에서 세운 목포의 정명여학교 화학선생으로 갔다. 그곳에서 첫아들인 김정식을 낳게된다(1926년). 7년을 교사로 지나고 목사가 되기 위해 다시 평양으로 가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졸업할 때 신사참배 문제로 졸업식에도 참석 못하고 투옥되고 만다.
그때 주기철 목사는 감옥에서 옥사했다. 김영윤도 악형과 고문을 받고 폐인이 되다시피 해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석방됐다.
그는 졸업장을 받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바로 황해도 안악장로교회에 초빙되어 갔다.
1936년이다. 아들 김정식은 안악 초등학교를 마치고 평양 광성에서 안악중고등학교로 전학해 졸업했고 연세 대학 의대에 입학했다.
김영윤 목사는 15년 동안 안악교회에서 목회생활을 했는데 그때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이들 중에 많은 애국자들이 배출됐다.
김구 선생 가족을 돌본 김홍량, 흥사단 단우이며 이북 오도청 황해도지사였던 김선량, 김구 선생의 가족 등은 김 목사의 애국적인 신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에 애국적 신앙 물려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북한 정치보위부에서는 김 목사를 심하게 감시했다.
이를 알아챈 교인들은 김 목사를 찾아와 같이 피난 갈 것을 청했으나 “한명의 교인을 위해서도 교회를 지켜야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끝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아내가 복막염으로 위급한 수술을 받기위해 해주 도립병원에 입원 하고 다음날 수술을 받았다. 여관으로 돌아온 그날 밤 정치보위부에서 김 목사를 체포해 해주감옥에 가두고 다음날 용담포 바닷가에서 총살했다. 그리고 바로 정치범이 갇혀 있는 감옥을 불살랐던 것이다.
그때가 미군이 북상중이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사모는 교인들의 간청에 6남매의 자녀를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했다.
김영윤 목사는 순교한 것이다. 2010년께 국가보훈처에서 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김영윤 목사는 강한 신앙심, 애국심을 갖고 교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사랑의 목회자였다. 그러면서 학구파였던 그는 모교 평양신학교 강사로 조직신학과 히브리어,헬라어를 가르쳤다.
필자가 김선량 황해도지사 비서로 있을 때 김 지사는 안악교회 시절을 얘기할 때마다 김 목사의 성자다웠던 기억을 되살려주곤 했다. 김 목사의 영향으로 본인도 중국 망명후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는 되지 않았지만 평생 장로로 해방교회를 지켰다.
김 목사의 부인은 3살이었던 막내까지 6남매를 데리고 서울에서 방황할 때 서울에서 공부하던 큰아들 김정식 장로를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혼자서 7남매를 키우며 일찍 병사한 딸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대학까지 보내 졸업을 시켰다. 그 남편의 그 어머니였다.
김정식 장로와 동생 김정원 장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까지 효도를 다했다.
어머니가 셋째 아들 김정원 장로 집에 있을 때 1991년 워싱턴 가정법률상담소에서 장한 어머니 상을 받았다. 그 이듬해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김정식 장로와 부인 최선이 씨.
■김정식 장로 “새로운 인생”
김정식 장로의 아내는 세 딸을 남겨두고 13년전(2008)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김장로의 나이가 80세가 넘었을 때이다. 1년후 현재 아내인 최선이 의사와 재혼했다. 두 사람은 학생때 서울 숭덕학사에서 같이 있었다.
최선이는 서울여자의과대학,김정식은 세브란스의과대학을 다닐 무렵이었다.
같은 교회 다니며 성가대원으로 봉사했고 성종합창단에서도 같이 활동했다.
김정식은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1951년 군의관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 제대후 1958년 뉴욕의 시립병원으로 오면서 최선이와 헤어지게 된 것이다.
최선이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63년에 토론토 결핵요양소로 오게 되어 인턴을 마치고 토론토에 있는 소아과병원을 거쳐 테네시주 멤피스에 있는 세인트 쥬드 소아과 병원으로 1969년에 부임해 왔다. 40이 넘은 나이에 레지덴트 수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나 20대의 젊은이와 같이 무사히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개인병원을 동료의사와 같이 개업한 후 뜻이 맞지 않아 군의관 지원을 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지원합격과 더불어 어려운 장교훈련을 마치고 미국, 독일군병원에서 14년을 복무하다가 중령으로 1994년 11월 퇴역했다.
퇴역후 차타누가에 살면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도서 100여권을 읽고 10여년간 성경공부에 매달렸다. 그는 62세에 독일 군복무 때 첼로를 배웠고, 73세에 수영을 배웠다. 80세가 넘어 첫 결혼식을 올렸는데 배우자가 바로 20세 때에 오직 한 남성으로 마음에 간직했던 김정식 장로이다. 최선이 의사는 “결코 늦은 때란 없다”(NEVER T00 LATE)라는 자서전을 얼마 전 출간했다.
결혼한 지 12년이 다 되어 가는 김정식, 최선이 부부는 둘 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차타누가에서 신혼부부처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부모로부터 이어 받은 김 장로의 신앙의 절개와 애국심에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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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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