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만난 ‘애국지사 후손들’ ⑥ 이우석 애국지사와 딸 이춘덕,외손녀 김명래
이우석(사진)
■ 3.1운동후 중국 독립군에 가담한 이우석
■ 김좌진 사령관 전속사병으로 자금 운반 등 활동
■ 하얼빈 독립군 기지에서 태어난 딸 이춘덕 권사
■ 애국심·신앙심 투철해 사위 이용보 목사 목회활동 도와
■독립군 분대장 이우석
이우석(1896년 9월17일~1994년 6월26일) 애국지사는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 분대장으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증인이다.
이우석 애국지사는 충북 충주시 에서 1896년 9월 17일 태어났다. 아버지 이창규는 딸과 이우석이 태어난 지 얼마 안돼 사업차 서울로 떠나 두 남매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우석이 서당에 나가 공부할 때이다. 어느 날 서당의 훈장이 눈이 부울 정도로 울더니 다음날 자살하고 말았다.
1905년 을사늑약때문인 것을 학생들은 알 수 있었다. 이우석이 9살 때이다. 훈장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라는 유서를 학생들에게 남겼다.
몇 년후 두 남매를 두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서울에 있으니 찾아가 보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때 친구며 형처럼 가까이 지내던 한봉수의 아버지가 의병에 가담해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는데 머리를 잘라 저작거리에 매달아 놓은 것을 보았다. 한봉수는 일본군에 원수를 갑기 위해 독립군에 투신한다고 집을 떠났다.
이우석도 훈장이 남겨놓은 유언을 마음에 새기고 아버지를 찾아 서울로 상경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던 이우석은 중국으로 독립군을 찾아 나서 우여곡절 끝에 북로정서군 김좌진 사령관의 직속 당번 사병이 됐다.
진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이우석은 김좌진 사령관의 전속사병으로 독립자금 수금 및 운반책임을 맡아 자주 동포들의 집을 방문하던 중 하얼빈의 부호 사업가 박 사장의 집을 방문하게 됐다. 그 집은 일찍이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은 초창기의 기독교인이었다. 아들 형제와 딸이 모두 평양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독립자금을 후하게 후원하던 이 집을 자주 방문하던 이우석은 그 집의 딸을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앓아눕게 되었다. 동료들이 이를 알고 밤에 그 딸을 납치해 독립군이 있는 산중부대로 데려왔다. 결혼한 동기가 극적이다. 그때 태어난 딸이 이춘덕이다. (뉴욕한인교회 이용보 담임목사의 장모이자 부인 김명래 사모의 어머니)
■7일간의 치열했던 청산리전투
이즈음 독립군은 대대적인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블라디보스톡에서 체코제 무기를 구입할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좌진 장군은 700리 이상 거리를 야간에만 움직일 수 있다는 불리한 조건에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염려되는 것은 독립자금의 전재산이다시피한 막대한 자금을 누구에게 맡기는가가 더 큰 문제였다.
그러나 가장 신임할 수 있고 건장한 자기 수족과 같은 이우석을 지명했다. 김좌진은 이우석에게 1개 분대를 선정토록해 튼튼하고 민첩한 동료를 뽑았다. 약 보름에 걸쳐 100여명이 무장할 수 있는 무기를 갖고 올 수 있었다.
1920년 10월 19일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국내의 3.1.운동 이후 한국의 젊은이들이 중국의 독립군에 가담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독립군이 더 커지기전 소탕한다는 계획에 청산리로 진입한 것이다. 이를 예견한 김좌진 장군은 완전 무장된 독립군 500여명을 매복시켰다.
이우석의 증언이다. 당시 일본군은 3.000여명이었다.
이 전투는 7일간 치러진 치열한 전투였다. 봉오동 전투 승리에 이어 항일 독립운동사에 기리 남을 최대의 승리였다. 독립군 사상자 50여명에 일본군 사상자 2,300여명이었다.
청산리 전투에 참패한 일본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 한국인이 사는 마을을 닥치는 대로 초토화 시켰다. 독립군은 이를 피해 블라디보스톡 우수리강 지역으로 피신했다, 러시아는 공산당 혁명으로 차르 왕정과 싸우고 있을 때이다.
러시아 공산당 지역에서 독립군에게 무장해제를 요청했으나 독립군이 이에 불복하자 사격을 가해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고 모두 포로로 잡혔다. 이우석은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해 흑룡강 기지로 돌아와 독립군과 재합류했다.
딸은 수개월 만에 아버지를 만났으나 아침이면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을 항시 피해야 했으며 새 작전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몇 달에 한 번씩 이우석이 독립군들과 함께 야밤에 들이닥치면 이우석의 아내는 돼지,염소,닭 할 것 없이 모조리 잡아 독립군을 대접하고 밤을 새며 남편의 옷을 꿰매고 신발의 각반을 만들어야 했다.
또한 떠날 때 가지고 갈 주먹밥까지 마련해야 했는데 그 고생을 짐작할 수 있다. 후에 이우석 지사는 기자인터뷰에서 독립군을 기억한다면 반듯이 목숨 걸고 뒷바라지를 한 그들의 가족들을 기억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우석 아내는 여러 자녀들을 출산했으나 독립군들과 같이 산과 들로 다니며 고생해 자녀들을 풍토병으로 거의 잃고 두 딸을 남겼는데 이춘덕 권사가 둘째딸이다.
■기독교인이 되다
독립군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평양 가까운 서해 작은 섬에서 재합류하기로 약속했다. 이우석도 책임완수를 하고 날짜에 맞춰 섬으로 갔다. 그런데 섬에서 장티프스에 걸려 동지들과 탈출을 못하고 사경을 헤매다가 바닷가 모래찜질만을 하고 살아났다.
그리고 배를 기다리며 무료하게 지내다가 그 섬에서 김익두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한다는 말을 듣고 참석했는데 그때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됐다. 그 후 독립군 영지로 다시 돌아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0여년의 독립군 생활을 벗고 동지들과 조선인 마을을 만들고 정착해 평화로운 민간인의 삶을 살게 됐다.
이우석은 마을의 지도자가 되어 모든 소유를 공동으로 하고 농사의 수확도 공동으로 분배하는 협동농장을 세웠다. 조선인 자치구였다. 그는 처음으로 가정생활의 행복을 체험했다고 회고한다.
1945년 해방이 되어 조국을 찾은 이우석 지사는 옛 동지들과 함께 치안을 맡아 한 1년간 나라를 위한 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친일파들이 자신들이 애국자들이었다고 날뛰는 모습을 보고 공무원직을 사임하고 가난한 노동자로 살아갔다.
신림동 무허가 8평 판잣집에서 살다가 6.25 사변 때 사랑하는 아내가 산후조리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타계했다. 그는 거의 노동으로 생활하면서도 남은 생을 신앙과 애국운동으로 살았다.
성격이 강직한 그는 나라에 애국자 등록을 하지 않다가 친구들이 등록을 해주어 비로소 청산리 전투의 마지막 증인자로 알려지게 됐다. 1990년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해방 후 평생을 서울 수표교 감리교회에서 장로로서 신앙생활을 하다 1994년 6월 26일 서울 보훈병원에서 9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용보 목사와 김명래 사모
하얼빈 독립군 기지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독립군들과 함께 생활하며 성장했던 이춘덕 권사는 2002년 도미해 캘리포니아주의 작은아들 김영래 목사(콘트라코스타 한인연합감리교회)의 목회를 도왔고, 10여년전 사위 이용보 목사와 딸 김명래 사모의 목회를 돕다가 2020년 6월 9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춘덕 권사는 후러싱 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특별한 절기에는 사위가 시무하는 뉴욕한인교회를 출석했는데 필자도 그때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기골이 장대하고 위풍이 당당해 보였다.
이용보 목사와 김명래 사모는 2012년 연합감리교회 뉴욕연회에서 뉴욕한인교회로 파송을 받고 10여년이 가까운 지금까지 시무하고 있다. 이 목사는 미국생활이 어려운 가운데도 장모님과 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두 분 모두 보기 드문 효자, 효녀다.
올해 4월 18일에는 뉴욕한인교회가 창립 100년이 되는 날인데 이제, 30여년간 꿈꾸던 교회건축을 완공해 입당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동시에 역대 목사들이 애써온 독립기념관을 국가로부터 인가를 받고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기금으로 내년에 독립기념관 개관식을 갖게 될 예정이다.
이용보 목사의 행정력과 책임감으로 이루어낸 결과이며 성도들의 기도로 맺은 열매라고 믿는다.
김명래 사모는 현재 미연합감리교회 한인여선교회연합회 전국연합회 사무총장으로 여성과 아동, 청소년을 위한 선교사역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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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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