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만난 ‘애국지사 후손들’ ⑦ 백남채 애국지사와 백혜선
백남채 애국지사
▶ 백남채, 대구지역 독립운동 도모하던 중 체포돼 옥고
▶ 산업진흥에도 힘써 비밀리 상해임정 재정후원
▶ 손녀 백혜선 뉴욕한인교회 음악감독으로 교회부흥에 일조
뉴욕한인교회는 삼일절 기념예배때 마다 애국지사 가정들을 초청해 교인들에게 소개하며 꽃다발을 증정하는 행사를 열어왔다.
교회 음악감독 및 찬양대 지휘자인 백혜선 피아니스트는 그때마다 한국가곡과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의 합창곡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을 들려주었다.
향수에 짙은 음률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물론, 그보다 가슴깊이 저며 드는 애국혼은 성도들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했다. 백혜선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기를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우리집 가문에는 애국자가 없을까’하는 궁금증이 들자 즉시 한국의 동생에게 물었고 할아버지에 대한 애국의 역사를 듣게 됐다.
백혜선은 4살 때부터 피아노에만 매달려 살아왔기에 가문에 대한 얘기는 전혀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일제치하에서 2년간의 감옥생활과 모진 고문에 건강을 해친 사실을 알게 됐다.
■백남채 애국지사(1886년 1월1일~1950년 10월)
백남채 애국지사는 경북 경산에서 백용달, 안순이 부부의 네 아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한학을 수학한 후 대구로 이주해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협화대학(북경대학)에 유학하던중 이시영 등 애국자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됐다.
1918년 졸업 후 귀국해 모교 계성학교 선생을 거쳐 교감과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어릴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그는 대구남산교회에서 30세의 나이에 장로로 추대됐다.
1919년 초 김순애(김규식의 처)와 동생 백남규, 이만집 목사, 김태련 조사, 홍주일(천도교 경북 교구장), 김마리아 등과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그해 2월 28일에는 이갑성을 대구제일교회에서 만나 3.1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의논을 하고 대구의 거사 일을 3월 8일로 정했다.
이갑성은 세브란스 재학생 이용상을 대구로 보내 이만섭에게 독립선언문 200매를 전했고 이를 전해 받은 백남채는 밤을 새어가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수백장 더 만들었다. 그는 계성학교는 물론, 신명여학교, 대구성경학교 학생들과 시민 동원을 책임 맡은 것이다.
그러나 거사일 3일을 앞두고 3월 5일 일경에 체포됐다.
백남채는 구속되었으나 3월 8일 첫 만세시위가 대구 서문밖 장터에서 일어났고 10일에는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2차 시위가 일어났다. 1,000여명이 넘는 시위였다.
백남채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때 받은 모진 고문은 평생 그의 건강을 괴롭혔다.
그는 독립운동과 옥고를 치르며 깨달은 것이 있었다. 독립운동은 나라의 힘에서 오는 것인데 그 힘은 교육과 재력에서 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옥에서 석방되면서 초등학교를 세워 이사장과 교장으로 교육에 힘쓰며 대구요업주식회사를 세워 산업진흥에 힘썼다.
동생 백남규는 상해 임시정부의 경상도대표로 독립운동을 했는데 자금을 형인 백남채가 후원했다. 백남채는 학교 유지를 위해 친일을 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교육에 전념하며 사업에 성공, 비밀리에 재정후원으로 상해임정을 도울 수 있었다.
해방이 된후 건국준비 치안유지회 위원장을 맡았고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에도 참가했다. 민주당에 소속된 그는 고달픈 정치행로를 걸으면서도 대구의 정의로운 야권운동의 전통을 세우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1950년 6.25 전쟁때 과로로 인한 폐암으로 10월 5일 65세의 짧은 일기로 별세했다. 한국정부로부터 1977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아들 백준기, 부친 뜻 이어 교육사업 힘써…장로직도 계승
백남채 애국지사의 맏아들이 백준기이다. 아버지 교육의 뜻을 받들어 대구 청구중고등학교 이사장을 20년 맡아왔고 지금은 그의 큰아들이 맡고 있다.
1947년 세브란스의대를 졸업하고 1953년 도미해 4년간 클리브랜드 클리닉에서 모든 과정을 마쳤다. 1964년도에는 경북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해 경북대 외래 교수로 재직했다.
그후 안과와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대구동산병원 과장을 거쳐 원장과 이사장으로 70년부터 1980년까지 봉직했다. 그는 부친의 장로직을 계승, 1961년 대구남산교회에서 장로가 됐고 경북노회장, 전국장로회 연합회장도 역임했다.
3남 1녀를 둔 백준기는 딸의 피아노 전공을 못 마땅히 여겼다. 교회반주 정도면 되었지 좋은 사람 만나 제 때 결혼하기를 바란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의사여서 외할머니 밑에서 철저히 피아노를 배운 백혜선은 14세(1979년)에 보스턴으로 유학와 10년 후 1989년 메릴랜드 윌리엄카펠 콩쿠르에서 우승, 뉴욕 링컨센터에서 독주회를 가지며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그때 가장 기뻐한 아버지는 딸의 뉴욕데뷔 연주소식을 듣고 뉴욕으로 왔다. 당시 그는 암선고를 받고 치료중이었다. 연주회를 본 아버지는 “네가 피아노와 결혼했다고 생각할게” 라고 하며 처음으로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때 뉴욕타임스는 음악계의 샛별이 떠올랐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었다. 아버지는 귀국한지 몇 달이 안돼 돌아가셨다.
이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리즈 콩쿠르 등 권위 있는 대회에서 잇달아 입상하며 일찍이 주목받기 시작했고1994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를 차지했다.
조부로부터 신앙심과 애국혼을 이어받은 백혜선과 자녀들
■찬양대 이끌며 후진양성 힘쓰는 백혜선
백혜선은 서울대 최연소 피아노 교수로 채용됐으나 연주생활을 위해 10년만에 사직하고 뉴욕으로 왔다. 2005년부터 뉴욕한인교회를 출석하는 그는 음악감독으로 찬양대를 지금까지 이끌며 후진양성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아들 토니는 첼로, 딸 애니는 오보에로 온 가족이 교회에 헌신하고 있는 셈이다.
백혜선은 아버지가 유학했던 클리브랜드의 클리브랜드 음악대학에 교수로 다년간 있다가 2018년부터 자신의 모교인 뉴잉글랜드 음악원의 교수로 봉직해오고 있다. 보스턴으로 온가족이 이사했으나 뉴욕한인교회 음악감독을 계속 맡고 있다.
필자가 뉴욕한인교회로 파송을 받았을 때(2005년)는 교회가 모든 면에 침체돼 있었다. 성가대는 5.6명, 주일학교 학생도 5명 정도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백혜선이 교회 출석한 이후부터 성가대는 물론 청년회까지 부흥해 1년만에 교회가 정상화 되었다.
그가 음악감독으로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젊은 음악전공 유학생들과 청년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쁘고 감사한 것은 뉴욕한인교회의 애국의 전통을 음악으로 다시 살리고 그 정신을 젊은이들에게 전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창립 100주년이 된 뉴욕한인교회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때문에 특별 애국강연, 애국음악회를 모두 취소하고 말았지만 신문과 방송, 영상을 통해 계획했던 모든 행사를 더 훌륭히 치르게 됐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뉴욕한인교회 백혜선의 제자들이 영상으로 애국의 노래를 합창하고 방송과 신문으로 모든 행사를 진행해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담임목사, 음악감독, 준비위원장과 위원들이 신앙과 애국혼으로 뭉쳐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백혜선의 조부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심,애국혼의 유산은 그의 자녀 두 남매에게도 이어져있다. 이들은 멀리 떨어진 교회를 위해 지금도 아낌없이 봉사하고있다. 이들 남매는 둘다 명문 하버드대에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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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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