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만난 ‘애국지사 후손들’ ⑧ 정학룡(1908.1.4~1951.3.23) 애국지사와 아들 정희준·손자 정철우
애국지사 정학룡, 부인 한온령
■ 동경유학 시절 독립자금 모으며 거사 기다리다
■ 동료의 변심과 밀고로 2년 실형 감옥살이
■ 감옥서 모진 고문과 악형으로 폐결핵 환자 돼
■ 부인 한온령이 남편 치료하며 3남매 키워
▶ 죽마계 얼과 정신 그 자손들에 3대째 이어져
▶교회의 궂은 일 도맡아 하며 기둥 역할
뉴욕한인교회 20여년간 3대가 교회를 지켜오고 있는 가정이 있다.
정학룡 애국지사의 아들 정희준과 그 아들 정철우 그리고 손자 정지호 이다. 지호는 교회학교 유년부의 주인공이고 아버지 정철우는 장년부를 대표하며 찬양대를 이끌어가고 있다. 지호의 할아버지는 노년층의 중심 인물이다. 지호의 증조 할아버지가 애국지사인데 20여년간 온교인들이 몰랐다.
손자에게 애국의 정신과 얼을 심어주기 위해 할아버지가 증조 할아버지인 정학룡 애국지사의 얘기를 비로소 하게 되었다.
■정학룡 애국지사
정학룡 애국지사는 황해도 봉산에서 1908년 태어났다.
사리원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몇 달을 앞두고,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봉산 청계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한온령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교회에서 청년부활동을 같이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왔다.
애국심이 강했던 한온령은 남편에게 유학을 권유하여 정학룡은 일본으로 가서 중앙대학 법학부를 1939년도에 졸업했다. 그는 재학시 중앙대학 조선인 유학생 총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곧 대학원에 진학해 계속 법학을 전공하면서 조국의 법조계를 위해 일할 사명감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이 모든 뒷바라지는 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아내가 도맡았다.
1940년대는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유학생들은 가슴에서 복받쳐 오르는 애국심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독립운동사 13권, 재일 유학생 민족운동(1)에 기재된 죽마계 결성경위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1940년 2월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안병익, 김사복 등은 “조선독립을 위한 결합체 조직의 필요성을 깨닫고 장래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선의 전통적인 친계의 방식을 따라 “죽마계”라 이름을 지었다.
그들은 13개의 취지를 설정했는데 하였는데, 첫째, 조선독립운동에 매진할 동지의 비밀과 영속적 결합체일 것. 둘째 단체의 명칭을 위장하기위하여 죽마계라 칭할 것 등이었다.
목적은 “민족적 양심적인 우리 동지가 참된 인간적 우정으로써 결합한 사상의식 결속 및 그 신념 구성을 촉진시키는 유기적 결합 밑에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일본제국의 기반으로부터 이탈시켜 조선문화에 기초한 독립국가를 건설한다”로 되어있다.
1940년 3월 동경 유학생 중심으로 죽마계가 조직되어 비밀결사 항쟁의 뜻을 품고 15명이 서약했다. 그중 한명이 정학룡이다. 동경이 중심이 되어 독립자금을 모으며 서울과 연락하여 거사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동료중 한명의 변심과 밀고로 1941년 6월 죽마계전원이 피체되었다.
1942년 3월 지방재판소에서 정학룡은 2년의 실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실은 7개월간의 경찰서 구금에서 취조를 받았는데 고문과 악형으로 폐인이 되었다.
감옥으로 이첩한지 몇 달이 안돼 정학룡은 폐결핵환자가 됐다. 형기 만기일을 앞두고 폐결핵 중환자가 된 정학룡은 1944년 여름 병보석으로 가석방돼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군포의 결핵요양원에 입원했다. 아내인 한온령은 광희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남편을 치료하며 3남매를 키웠다. 1년후 해방이 되어 자유의 몸이 된 정학룡은 신한민족당(당수 한용진)의 정치부장으로,한국독립당(당수 김구)의 중앙위원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애썼으나 지병으로 활발한 활동은 할 수 없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더 이상 치료를 받지 못한 정학룡은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1951년 3월 애국의 한을 품고 서거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1963년 대통령상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애국의 친구들은 그의 묘비에 이렇게 새겼다.
“조국 광복의 뜻 봉산에서 세워 / 청춘 불살라 그 뜻 키우시니 / 일경의 잔인한 고문도 / 쓰라린 영오의 세월도 / 님의 굳은마음 꺽지 못했네 / 해방조국 재건에 쏟은 님의 정열 보람없이 / 분단의 한 품으신채 영민하시니 / 불구된 조국 슬픈 오늘이여 ! /”
홀로된 아내는 평생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교육에 힘쓰며 혹사한 그는 건강을 해치고 아들인 정희준 집에서1965년 소천했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정학룡 애국지사의 후손들인 정희준(오른쪽)과 일가족.
■정희준과 아들 정철우
정희준은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법대를 나와 은행에서 근무하며 두 아들을 모두 미국으로 보내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원을 졸업시켰다. 작은 아들은 건축학을 공부, 한국 건축회사에서 근무하며 큰아들은 물리학을 전공해 26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과학고등학교를 2년만에 졸업, 과학기술대학(KAIST)을 3년 반만에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5년만에 모두 마친 것이다. 지금은 롱아일랜드 브룩해븐 연구실(Brookhaven National LAB.)에서 20여년 이상 연구원으로 재직해 오고 있다.
신앙도 열심이어서 손자,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두가 교회의 기둥역활을 해오고 있다. 필자가 2005년부터 2012년 목사로 은퇴할 때까지 이들은 한번도 주일을 빠진 적이 없고 교회의 궂은일은 도맡아 해오고 있다. 교회를 다시 정상궤도에 이룩해 놓는데 큰 역활을 담당해온 숨은 공로자였다.
특히 매년 3.1절 행사에 정희준 부부가 항상 참석한다.
지칠줄 모르는 신앙과 충성심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조상때부터 물려받은 신앙과 애국정신에서 온것이다. 바로 죽마계의 얼과 정신이 그 자손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확신한다.
정철우 박사의 연구실에서 인류를 위한 새로운 연구 실적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이들의 열성적인 신앙생활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필자는 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못다한 애국의 결실이 손자대에 이르러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자못 궁금하면서 기대한다. 그러기에 계속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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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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