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만난 ‘애국지사 후손들’ ⑩ 최호일(1886~1920) 애국열사와 엄호택
최호일 열사의 딸 최영식
▶ 대한독립총단의 독립운동자금 책임
▶ 친구이자 사돈인 엄병환이 독립자금 후원
▶ 딸 최영식은 송죽원 창설 전쟁고아들의 대모역할
▶ 외손자 엄호택, 뉴욕한국일보 통해 한인사회 기여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살고 있는 엄호택은 손자를 위해 이발소를 들렀다.
2012년 한국일보 신문에서 독립유공자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독립유공자중 연고자를 찾지못해 건국훈장을 전달 못한 후손이 수천명에 이른다는 글이었다. 자신이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외할아버지의 애국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즉시 국가보훈처에 연락해 할아버지의 존함과 생년월일을 알렸다.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여자로 되어 있었다. 그는 잃었던 할아버지를 찾은 것 같아 뛸 듯이 기뻤다.
■최호일 애국열사
최호일 애국열사는 1886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의 홍원 주모자로 지목되어 만주로 피신한 그는 독립당에 가담했다.
애국심이 투철하고 책임감이 강한 그는 대한독립총단의 독립운동자금의 책임을 맡고 함북 삼수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했다. 그때 사돈인 엄병환(엄호택의 조부)은 홍원에 거부였다.
운송회사 버스 운용과 정미소,양조장 등 사업체를 이끌고 있었다. 친구이며 사돈지간인 그는 암암리에 최호일을 통해 독립자금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날도 독립자금의 목표액을 달성한 그는 장백산맥을 타고 산수갑산을 거쳐 삼수에 거의 이르렀을 때 일경에 발각됐다. 삼일운동 이후 함북과 중국,러시아 국경이 가까운 이 지역을 일본의 사단병력이 감시하고 있을 때였다.
심문에 걸린 그는 허리춤에 끼워 넣은 돈이 발견된 바람에 독립군임을 눈치 챈 일경에 의해 압송됐다. 최호일은 신발 각반에 그리고 윗저고리 사이사이에 감춰진 군자금이 또 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경과 군인들의 배치장소를 거의 파악하고 있었기에 이 사실을 본대에 알리는 것이었다. 살아야한다는 용기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사명을 완수해야한다는 일념에 한순간 포승줄을 끊고 지키고 있던 보초를 장작개비로 내리쳤다. 서 너 명이 군도를 뽑아 달려들었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갈 때 왜놈의 칼이 그의 팔과 옆구리를 스쳤다. 사력을 다해 앞이 보이지 않는 산길을 달렸다. 새벽녘 삼봉 진영으로 달려온 그는 쓸어져 기절했고 온몸은 피로 범벅지고 계속 옆구리에서 피가 흘렀다.
얼마후 깨어난 그는 숨겨져 있던 군자금을 전해주고 살펴두었던 적장의 요소와 요로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과다 출혈과 칼의 독소가 퍼져 몇 시간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죽기까지 자기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때 같이 있었던 동료 중 한 사람의 증언을 통해 알려지게 됐고 어린 딸과 아내가 살고 있는 홍원에 전달됐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딸 최영식 여성 인권운동에 큰 역할
다행히도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미망인과 딸은 선교사를 따라 개성으로 이사했다. 영특한 딸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전액장학금을 받고 호수돈 여학교에 입학했다.
열심히 공부하며 테니스 선수가 돼 1929년 동아일보 주최 전국 테니스대회 여자부에 출전, 일본선수가 대부분이었던 상황에서 1등을 거머쥐었다. 그의 동창으로 모윤숙, 박마리아, 최이권(백낙준 부인)등 인물들이 많았다.
호수돈 옆에는 역시 선교사가 세운 송도고보가 있었다. 그때 같은 고향에서 내려와 공부하던 엄진기를 알게 되어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결혼 후 엄진기는 일본유학으로 모리우까 농대를 졸업했다. 동기가 세계적인 육종학자인 우장춘이다. 1935년께 귀국한 그는 한국의 농업기술을 현대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최영식은 해방이 되어 박현숙(회장), 황애덕, 황신덕, 이신덕과 함께 이북여성동지회를 결성했고 서기를 맡았다. 이들은 대한민국 건국에 큰역할을 담당했다.
한국동란 6.25 전쟁이 났을 때 미처 피란하지 못한 엄진기는 납북되고 말았다. 졸지에 홀로된 최영식은 엄호웅, 엄호택 두 아들을 키우며 대학까지 졸업시켜 미국유학까지 보냈다. 그는 아버지가 못 다한 애국운동을 국내에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열심을 다했다.
부산 피난 때는 납북미망인 여성회를 조직해 총무로 실제업무를 맡아 그들을 보살폈다. 뿐만 아니라 1955년경 송죽원 고아원을 창설해 전쟁고아 수 백 명을 수용하여 대모 역할을 수년간 했다. 이 모두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애국혼의 발로였다.
■뉴욕 한인사회에 기여한 엄호택
엄호택은 1965년 도미해 30여년이상 뉴욕에서 생활했다.
뉴욕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많은 수고를 하였다.
1966년 교회창립이래 7명의 집사를 선출할 때 한사람으로 선출됐다.
교회재정이 어려울 때 회계를 맡았다. 목사의 생활비가 모자라 자신이 채울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때 주일 헌금이 평균 30달러였다.
교회생활에서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자신이 교회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변금희, 허병렬과 더불어 한글학교를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서 한글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점점 많아져 정식 한글학교 설립을 위해 건물을 물색하게 됐다.
브롱스에 있는 케네디 고등학교 교실을 찾았다. 그러나 월 150달러, 그리고 6개월분의 선금을 요구했다.
엄호택은 형인 엄호웅을 찾아가 1,000달러 가까운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당시 뉴욕한국일보를 운영하고 있던 형은 미주에 처음 생기는 한글학교를 위해 요청한 전액을 후원해주었다. 당시 코압 아파트 값이었다.
한기범(한상돈 목사 아들) 목사, 김홍준, 정한길, 허병렬, 본인 등이 주축이 되어 한글학교가 서게 되었다. 1974년 이었다. 뉴욕 한글학교의 모체가 되어 지금까지 존속해 오고 있다.
또 한 가지 새롭게 기억나는 일이 있었다. 1967년 윤응팔 목사가 있을 때이다. 엄호택의 가정에 첫 아들이 태어나 1967년 어머니를 초청했다. 서울 성남교회 권사인 어머니는 아들과 같이 뉴욕한인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친교실에서 윤 목사의 사모인 김상순을 만났다 38년전 헤어진 호스돈 여학교 동창을 만난 것이다. 김상순 사모는 1929년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시집을 간다고 모든 동창들이 부러워했는데 뉴욕에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이다.
몇 달후 한국으로 돌아간 엄호택의 어머니 최영식은 김활란 박사와 같이 여성주부클럽을 창설해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여성 인권운동의 큰 역할을 하였다. 평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살았다. 아버지의 애국혼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1995년 8월 소천해 평생을 온 가족과 같이 신앙으로 보낸 성남교회에서 교회장으로 생을 마쳤다. 향년 87세였다. 그의 아버지가 정부로부터 애국장을 받은 전해이다.
엄호택은 형의 뒤를 이어 뉴욕한국일보를 맡아 1996년 까지 29년간 운영했다.
뉴욕한국일보는 뉴욕의 한인사회와 동포들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국 라디오 방송이 1972년도에 생겨 1일 1시간방송으로 시작해 1984년도에는 매일 24시간 방송을 진행했다.
매년 뉴욕 미인 경연대회를 통해 한국에 유명 탤런트들을 대거 배출했고 1980년부터 뉴욕한인회와 코리안 퍼레이드를 개최하고 있다.
그외 뉴욕타임스 한국어판 8페이지분량을 10여년 보급했고, 어린이 사생대회, 청소년 운동경기, 골프대회, 산악회를 통한 등산 등 한국인의 문화와 애국의식을 통한 정체성을 찾는 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오늘날 뉴욕한인봉사센터(KCS)가 활발히 움직이며 동포사회에 많은 봉사를 해오고있다. 실은 10여년간(1980년~1990년) 한국일보에서 매달 1500달러를 지원해 주며 밑거름 역할을 해준 것이다.
모두가 동포사랑 나라사랑의 얼속에 피어난 열매라 믿는다.
필자는 지난 12월부터 매주 수요일자 뉴욕한국일보를 통해 연재해온 특집, 뉴욕지역 독립운동 발자취 시리즈를 12회로 마감한데 이어 ‘장철우 목사가 만난 애국지사 후손들’ 시리즈를 10회로 마감한다.
끝으로 가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애국심의 감격으로 다음과 같이 만세를 부르고 싶다.
조국 대한민국과 애국선열들 만세 !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과 뉴욕동포 들 만세 ! 뉴욕한국일보 만세 ! <끝>
<
장철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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