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퍼 리’의 유명한 고전소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는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에서 일어난 자전적 실화를 바탕으로 배심원제의 폐단을 그려내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아빠 겸 국선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는, 젊은 백인 여성을 성폭행하려 했다고 모함을 받고 있는 흑인 ‘톰 로빈슨’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백인 일색의 배심원단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한다. 배심원단의 유죄 평결에 절망한 톰은 탈옥을 시도하다 결국 총에 맞아 죽고 만다.
미국은 수정헌법을 통해 배심원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톰 로빈슨의 경우처럼 배심원들이 적대감을 가지고 나의 사정을 애써 외면한다면 그것은 있으나마나 한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노예제와 밀접하게 얽혀있는 미국 남부지역 백인 배심원단의 흑인에 대한 만행은 수없이 반복된 슬픈 흑역사다.
돌이켜보면 이게 비단 미국 남부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불과 37년 전인 1987년까지만 해도 미국의 검사들은 ‘전단적 기피’(peremptory challenge)라는 특권으로 배심원 후보 중에서 흑인이나 소수계 인종 등 자신에게 불리해 보이는 사람을 특별한 이유를 대지 않고 기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은 켄터키주에서 주거침입죄로 재판에 회부된 흑인 남성 ‘제임스 뱃슨’(James Batson) 사건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백인 일색의 배심원단으로부터 유죄를 선고받은 뱃슨은 검사가 배심원단 후보 중 흑인을 부당하게 기피했기 때문에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며 항소했고, 연방대법원이 1987년 뱃슨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채택된 개선안을 법률용어로는 ‘뱃슨의 도전’(Batson Challenge)이라 일컫는데 배심원 선정 단계에서 변호사가 적극 활용한다. 즉, 검사가 피고인과 같은 인종을 배심원에서 배제하기 위해 ‘전단적 기피’를 행사하면 피고인 측 변호사는 ‘뱃슨의 도전’으로 이들을 배제하지 못하도록 응수하는 식이다. ‘뱃슨의 도전‘으로 배심원 선정에 있어서의 인종적 편견 문제는 어느 정도 공평해진 셈이다.
하지만 최근 필자가 법정에서 느끼는 새로운 문제점은 배심원 후보군의 범위가 근본적으로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배심원 재판이란 게 짧게는 며칠에서 더러 몇 달씩 걸리는 경우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이 긴 기간 동안 온전히 일터를 비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봉급을 받는 회사원들이야 배심원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결근은 당분간의 불편이나 업무 복귀 후 잔무 처리 등의 불이익만 감수하면 그뿐 금전적 피해는 없다.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나 자영업자들 입장에서는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뉴욕주의 경우 이런 배심원들에게 매일 40달러씩 지급한다. 하지만 이 돈도 6~8주 후 체크로 주는 데다 온종일의 배심원 업무에 비하면 최저시급도 되지 않는 금액이다. 여기에다 법원에 오가는 교통비와 식비 등을 감안하면 실비에도 훨씬 못 미친다. 상황은 연방법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연방 배심원은 1~9일 차까지는 하루에 50달러, 10일째부터는 60달러를 받는다.
따라서 판사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딱한 사정을 고려하여 이들을 대개 배심원 명단에서 빼주는데 그렇게 빼주고 나면 주나 연방이나 배심원 후보군은 샐러리맨이나 대학생 정도로 좁혀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인종적 편견이 제일 문제였다면 이것이 해소된 지금 와서는 그에 못지않게 직업적 편견이 떡 하니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문제점들을 어떻게 보완하고 개선해야 할지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고민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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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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