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비권이라 함은 필자의 지난 칼럼 ‘미란다 원칙’(2021.5.5.)에서도 잠깐 소개한 바 있듯이 피의자, 피고인, 또는 증인이 수사나 재판 절차에서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침묵권을 말한다.
이 권리는 17세기 말 영국에서 죄인들로부터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 형사처벌했던 관행에 반발하면서 생겨났다.
영국의 법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미국도 수정헌법 제5조에서 이를 보장하고 있다.
묵비권은 형사사건에서만 인정되고 민사상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민사사건에서는 오히려 진술 거부로 인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묵비권 행사의 중요성은 거짓 자백으로 무고한 옥살이를 한 ‘센트럴팍 5인조’(Central Park Five)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1989년 4월, 28세의 백인 여성 ‘트리샤 메일리’(Trisha Meili)는 심야에 뉴욕시 센트럴 팍에서 조깅을 하다 괴한에게 무차별 폭행과 강간을 당하고 옷이 모두 벗겨진 채로 유기되었다. 문제는 트리샤가 폭행으로 뇌를 다쳐 범인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건의 불똥은 황당하게도 사건 당일 센트럴 팍 근처에 있었던 14~16세의 흑인과 히스패닉계 청소년 5명에게 튀었다.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었지만 노회한 형사들의 장시간 신문을 견디지 못하고 거짓 자백을 하게 된다. 이들의 거짓 자백을 토대로 맨하탄 검찰청은 배심원단으로부터 유죄 평결을 이끌어냈고, 피의자들은 5~12년의 징역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그로부터 13년쯤 뒤인 2002년, 살인과 강간으로 33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던 ‘마티아스 레이예스’(Matias Reyes)가 센트럴 팍 사건은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함으로써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결국 DNA 대조 결과 마티아스가 진범으로 밝혀짐에 따라 2014년 뉴욕시는 피해자들에게 4,100만 달러라는 뉴욕주 역사상 최고의 배상금을 지불하여야만 했다.
이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아무리 자신이 무고하다 하더라도 수사기관으로부터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을 받을 때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게 현명하다.
만약 이들 청소년이 묵비권을 제대로 행사했더라면 사건이 그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묵비권은 엄연히 헌법에서 보장된 국민의 권리이고, 사건을 규명하여 범인을 체포할 책임은 어디까지나 수사관서에 있다고 보면 경찰로서는 묵비권자 외에 다른 데서 추가 증거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피의자로서 조금이라도 유죄가 될 것으로 판단되면 더욱 묵비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경찰의 수사에 당황해 중요한 사실에 대한 진술을 빠트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사재판 실무에서는 많은 피의자들이 묵비권을 간과하고 행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수사기관에 사실대로 이야기해주면 감형해 줄 것으로 생각하거나, 기소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희망사항일 뿐이고, 괜히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다보면 유죄 증거만 더 보태주는 격이 된다.
또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럴 경우에는 나라에서 국선변호인을 붙여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묵비권 행사 시에는 수사관에게 직접, 간결하고,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해야 법적으로 묵비권을 인정받는다는 것도 유의할 점이다.
가령 “변호사와 상의해봐야 할까요?(Should I talk to lawyer?)”라든가 “변호사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Maybe I should talk to a lawyer)”와 같이 애매하게 의사를 표시하면 상황에 따라 묵비권 발동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저는 할 말 없습니다. 변호사를 불러 주세요(I’m going to remain silent. I would like to talk to a lawyer)”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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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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