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연방 대배심원단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밀문서 유출 혐의로 공식 기소했다. 미국은 대통령이 퇴임할 때 재임 시 작성했거나 취득한 공문서를 국립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인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를 어기고 대량의 기밀문서를 사저로 반출했을 뿐 아니라 NARA의 반환 요청을 장기간 묵살한 혐의도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유·무죄 여부는 추후 재판을 통해 가려지겠지만,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이 기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연방 대배심의 이번 결정은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no one is above the law)라는 미국 법치주의의 준엄한 본보기를 보여준 것으로 길이 평가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와 더불어 정의의 수호자이며 미국 법치주의 최후의 보루라 일컫는 연방대법관들에 대한 추문도 연이어 들려와 우리를 우울하고 혼란스럽게 한다.
정부윤리법에 의거 미국의 고위 공직자들은 매년 재산신고를 하도록 되어있다. 본인은 물론, 직계가족까지 모든 돈의 출처와 사용처에서부터 주식 및 부동산 등의 재산 변동사항과 향응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자세히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4월 온라인 뉴스 매체 ‘프로퍼블리카’(ProPublica)의 보도에 따르면 ‘클래런스 토마스’ 대법관은 공화당의 고액 기부자인 ‘할란 크로’로부터 20여 년 동안 개인 제트기와 요트 제공, 본인이 돌보던 조카의 사립학교 학비 등 수많은 경제적 지원을 받고도 이를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토마스 측은 “크로와는 오랜 친구 사이로 업무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항변하지만 이미 내상을 크게 입었다는 게 중론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토마스에 그치지 않고 2명의 대법관이 더 구설에 올랐다는 것. ‘사무엘 알리토’ 대법관 역시 헤지펀드 억만장자이자 공화당 지지자 ‘폴 싱어’가 제공한 전용 제트기로 알래스카 낚시 여행을 다녀왔으나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또 성격은 좀 다르지만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미국의 거대 출판사 ‘펭귄랜덤하우스’를 통해 자신의 책을 출간하면서 수백만 달러의 인세를 받은 바 있음에도 대법원에서 심리한 펭귄랜덤하우스의 소송에서 스스로 회피(recuse)하지 않았다는 공격을 받고 있다.
미국법에 판사나 심사위원, 변호사 등은 자신이 사건을 맡을 경우 공정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스스로 그 사건을 회피하도록 되어있다. 예컨대 판사가 특정 회사의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회사의 사건은 심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뒤로 빠지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연방법원의 연방판사 행동강령에는 판사로서 지켜야 할 외부활동 지침 등 윤리규범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임기가 정해져 있거나 선거로 선출되는 각 주의 판사들과는 달리, 종신직 신분이 보장된 연방판사들에겐 이의 구속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연방대법관들은 행동강령을 형식적 권고사항 정도로 여기기 때문에 타인의 경비로 호화여행을 다녀오든,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건에서 이를 모른 척 하든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에 ‘딕 더빈’(Dick Durbin)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을 위시한 일부 의원들은 ‘대법관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행동을 고치지 못한다면 의회가 나서서 규정을 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의를 환기한다. 또 과거 일탈 정도가 심한 판사들을 의회에서 탄핵한 사례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국격에 심대한 상처를 입힐 것은 자명하다. 그보다 최상책은 연방대법관들도 지엄한 대법관이기에 앞서 나라로부터 국록을 받는 공복의 일원임을 깨닫고 품위있는 처신으로 미국 사법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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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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