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저문다. 어느새 희망 가운데 맞이한 새해가 지나고 한해의 끝자락을 맞이한다. 한해의 끝자락에 오면 우리는 모두 시인이요 철학자요 구도자가 된다. 시간의 소중함과 흐름을 문득 느끼고, 소소한 일상과 만남의 소중함을 깨닫고, 새벽의 신비와 석양의 아름다움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감동한다.
시간 앞에서 지니는 이러한 마음은 옛사람들이라 하여 다르지 않았다. 공자는 어느 날 개울 다리 위에 서서 흘러가는 냇물을 보며 이렇게 외쳤다.“서자여사부(逝者如斯夫!), 불사주야(不舍晝夜)”(논어)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도다” 흘러가는 물만을 보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는 흐르는 물처럼 쉼없이 흐르는 세월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한해를 보내며 드는 마음을 꼽으라면 아쉬움과 허전함이다. 개인의 한해살이가 그렇고 세상을 들러 봐도 그러하다. 특별히 12월 3일 고국 대통령의 위헌 불법 비상계엄선포는 온 국민과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답답함을 넘어 부끄럽고 참담하다.
다행히 용감하고 성숙한 민주시민들, 야당 국회의원들과 당직자들의 대응, 위헌 계엄명령에 소극적으로 저항한 일부 군인들 그리고 SNS의 힘으로 비상계엄 선포는 단 몇 시간만에 해제 되었다. 그럼에도 내란 혐의를 받는 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더디고 발의된 대통령 탄핵안 처리과정과 인용 여부가 불투명한 가운데 있어, 아직도 불안과 혼란이 여전하다.
답답하고 아쉬움 가득한 한해로 뉘엿이 저물어 갈 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와 그가 보인 작가로서의 품격있는 반응, 인간성에 대한 통찰과 따듯함을 담은 수상소감은, 사막의 오아시스 그 이상이었다. 한해 내내 답답하던 마음의 체증이 일시에 뚫리는 시원함이다. 문학 문외한(門外漢)의 눈으로 보아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문은 인간성에 대한 간결하고 섬세하며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읽을수록 마음이 따듯해지고 맑아지는 명문이다.
“…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묻는 언어,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체의 일인칭 시점으로 상상하는 언어, 우리를 서로 연결해주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지니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
작가의 수상소감문은 울림이 크다. 시의 형식은 아니지만 시적이다. 아름답고 따듯하다. 작가의 말대로 글에서 체온이 느껴진다. 철학 서술은 아니지만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 작가는 문학가로서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를 반대해야 함을’ 말한다. ‘생명의 풍성함을 위하여’오신(요한10:10) 예수의 생명 평화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그의 소감문에는 종교의 언설은 아니지만 경전(經典)의 정신이 그 안에 녹아있다. 이런 멋진 수상소감을 만나다니, 올해의 행운이다.
작가는 어린시절에 저마다의 ‘나’로 살아가는 1인칭 시점의 ‘나’를 보는 경이로운 체험을 했다고 한다. 종교적 체험에 버금가는 이런 체험은 작가로 하여금 밝음과 어둠, 선과 악이 혼재하는 역사 속에서 치열하게 인간다움을 묻는 구도적(求道的) 문학가의 길로 나아가게 했을 것이다.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문학 정의(定義)는 비단 문학이나 문학가에 대한 정의를 넘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의 지향점에 대한 제시이기도 하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소감은, 아쉬움과 허전함 가득한 한해의 끝자락과 새해의 희망과 다짐을 새롭게 하는 한해의 첫머리를 이어주는 아름다운 인생의 화두(話頭)를 담고 있다. 저 시냇물처럼 밤낮 그치지 않고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때로 냉혹하고 때로 거친 역사의 현재 속에서 지녀야 할 삶의 말머리(화두)는 ‘인간으로 남는 일이다’. 해가 바뀌어도, 나이가 들어도, 세상이 바뀌어도‘인간다움’을 지니고 사는 일이다. 그것이 노동과 학문과 예술, 기도와 종교, 인생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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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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