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or Plastic?”
종이봉투에 담아드릴까요, 아니면 비닐봉지에 담아드릴까요. 이제는 좀체 듣기 힘든 질문이다. 한때는 할로윈 날의 “Trick or Treat”, 패스트푸드 매장의 “For Here or To Go”와 더불어 미국 오면 처음 배우는 생활영어 삼종 세트였는데… 한국에서 배운 영어 비닐이 아니고 플래스틱이라 부르는 것도 꽤 인상적이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그러나 나이는 갑장이 어린 스물하나의 나이에 가족을 따라서 미국에 이민 온 분의 추억담을 읽었다. 영어를 못 하던 6개월차에 “Do you have any opening position?” 이 문장 하나 딸랑 외워서 이 가게 저 가게 일자리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첫 잡이 백인동네 수퍼마켓에서 손님 장바구니 싸주기. “페이퍼 오어 플래스틱”을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입을 연 영민한 청춘은 캐시어와 손님들 사이에 오가는 작은 인사들로 차차 귀를 열었을 것이다.
직장생활을 제법 하다가 서른 초반에 미국에 온 나는 어린 나이에 온 사람들이 부러웠었다. 특히 나와 한국말이 통하는 1.5세들. 나도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영어도 하고 그러면 직장도 더 좋은 걸 잡을 수 있을텐데, 그런 아쉬움을 속으로 쌓아갔다. 한해 한해 알아갈수록 그건 내 짧은 생각일 뿐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서 이십 대 초반에 온 친구들은 나보다 더한 아쉬움을 안고 산다는 걸 알게 됐다. 아예 더 일찍 왔으면… 그냥 한국에서 살게 놔두지…
이게 다 영어가 부리는 요사다. 미국에서 영어가 우선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들 아는데 막상 실천은 쉽지 않다. 내 조카가 온다면 오자마자 일년은 영어공부만 시키겠다, 말은 그렇게들 한다. 막상 도착해서 ESL 코스라도 들어보려고 커뮤니티 칼리지를 알아보면 인스테이트(in-state) 거주민 자격이 안 되니 수업료가 장난이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어정거리다 보면 주변에 눈치가 보인다. 사지 멀쩡한데 놀고 먹는 이는 없는 곳이 초기 이민사회였다. 가족이 하는 가게로 혹은 한글 신문의 구인매매란을 뒤져 일을 나간다. 대개는 영어를 쓰지 않는 일자리들. 일년이 지나 거주자 학비 적용을 받을 수 있어도 당장 또박또박 들어오는 캐쉬를 포기하고 영어공부를 시작할 여유는 없다. 그게 과거 이민 세대들의 현실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이민 간 친구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웃이 주변에 더러 있다. 그래도 나보다는 경험이나 말이 나아서 장사를 제법 규모 있게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이 부러운데 그들은 나를 부러워 한다. 한국에서 해볼 것 다해보지 않았느냐, 대학 다니고 연애 하고 직장 다니고 동료, 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군대 갔다 온 것조차 부러워 한다. 제대로 누리지 못한 청춘에 대한 회한이 큰 것이다. 가슴 어딘가에 뻥 뚫린 구멍이 있다.
그런 사정을 조금은 알기에 계산대 컨베이어 벨트 뒤에 서서 손님이 본 장을 정신없이 봉투에 담고 있던 스물한 살의 그 처자에게 늦게나마 시간차 위로를 보낸다. 봉투 담는 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빠는 진주 남강의 아낙처럼 야채는 야채대로, 냉장 냉동은 또 따로, 무게 균형 잡아가며 손님이 들기 좋게, 가다가 터지는 사고 없게 신경을 써야 한다.
서부의 그분은 박스 보이(box boy)라고 배웠나 본데 이 동네 그로서리에서는 백 보이(bag boy)라는 표현을 쓴다. 또 다른 말로 bagger, packer, sacker가 있다. 보통 고등학생 알바 일자리였는데 인건비 부담이 커진 요즘에는 인력 줄이는 게 일이라 좀체 볼 수 없다. 한편 페이퍼 백이 먼저 사라지고 환경 문제로 플래스틱 백은 장당 5센트 세금조로 받는 지역이 늘어 손님이 장바구니를 가져와 카트에서 알아서 담는 추세다.
내가 처음 일했던 그로서리는 계산대 세 개를 돌리는 중형의 수퍼였는데 바로 뒤에 아파트 단지를 끼고 있었다. 그 단지는 미국에 건너온 히스패닉들이 처음 자리잡는 곳이었다. 가족은 드물고 한 집에 시커먼 사내들이 우글우글 잠만 자는 형태. 그래서 가게 손님 또한 남자 일색이었다. 저녁에 일 마치고 돌아와 밥 먹고 나와서는 가게에서 캐시어들 뒤에서 백을 싸주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그렇게 노닥거리는 걸 나쁘게만 볼 수는 없었다.
페이퍼 오어 플래스틱.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처럼 이제 다 옛날 얘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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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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