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상설(鬢上雪)‘은 20세기 초에 활동한 신소설 작가 이해조가 ‘제국신문‘ 기자로 근무하면서 연재했던(1907. 10∼1908. 2) 소설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신학문의 고취를 가미한 전형적인 신소설이다. '(눈처럼)하얗게 센 귀밑머리'를 뜻하는 제목의 이 작품은 처첩(妻妾)의 갈등 때문에 몰락해가는 북촌 부잣집을 소재로 개화기의 혼란상을 그리고 있다.
빈상설(鬢上雪)의 ‘빈‘은 살쩍 빈(鬢)자로 ‘살쩍‘은 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카락, 귀밑머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빈상설(鬢上雪)을 직역하면 '귀밑머리카락 위에 내린 눈'이란 뜻이다.
이 소설에서 ‘을사년시럽다’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다. 3년 전인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제국주의 일본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당시 온 나라가 비통함과 울분으로 가득 찼었다. 그 때 가슴 아픈 말, ‘을사년시럽다’는 말이 맨처음 생겨났다. 그 뒤에 ‘을사년→을시년→을씨년’으로 변했다고 한다. 120년 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을사년은 우리 겨레에게 을씨년스러운 해였음이 틀림없다.
120년의 시차를 두고 2025년 올해도 을사년, 뱀띠 해다. 신진대사가 되지 않는 뱀 껍질은 시간이 흐를수록 딱딱하게 굳어진다. 이것을 그대로 두면 속살이 터져 죽고 만다. 뱀은 허물을 벗어야 살 수 있다. 그래서 뱀은 오래 전부터 치유와 재생의 상징이 되었다.
동양에서는 허물 벗는 뱀을 변신과 지혜의 영물(靈物)로 여겼다. 우리 조상들은 집 안 어딘가에 머무르던 텃구렁이가 떠나면 재앙이 닥친다는 주술적 터부를 지니고 있었다. 한 해에도 여러 번 허물을 벗고 다시 새 몸으로 성장해가는 뱀은 재생과 변화의 상징이 되었고, 알을 많이 낳는 다산성 때문에 복과 풍요의 화신으로도 인식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독특한 로고 엠블럼 마크는 그리스 신화에서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Rod of Asklepios)를 지혜의 상징인 뱀 한마리가 감고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아스클레피오스가 뱀이 물고 온 약초로 죽어가는 환자를 살렸다고 믿었다. 뱀을 불로장생과 불사의 의미를 가진 지혜의 동물로 여겼다. 뱀이 치유와 재생의 상징이 된 이유다.
그렇지만 많은 뱀은 독을 품고 있다. 코브라와 바다뱀은 중추신경을 마비시키는 신경독을 지녔다. 방울뱀이나 살모사는 근육과 모세혈관을 망가뜨리는 출혈독을 가지고 있다. 모두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는 치명적인 독이다. 월남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은 ‘Three Step Snake’라는 애칭을 가진 ‘크라이트(krait)’ 독사를 적보다 더 무서워 했다고 한다. 그 독사에 물리면 세번 걸음도 못가서 죽는다고 한다.
독사 중 최강자로는 ‘까치살무사‘가 있다. 몸에 까치처럼 희고 검은 무늬가 있다고 까치살무사라고 부른다. 머리에 점이 7개 있다고 칠점사, 물리면 일곱(七) 걸음(步)을 걷기도 전에 죽는다고 해서 칠보사(七步蛇)라고도 부른다. 까치살무사의 맹독에서 항암물질을 추출하는 실험이 성공했다고 한다. 치명적 질병인 암을 치료하는 약이 치명적인 뱀의 독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약이요, 파르마콘(pharmacon)인 셈이다.
그리스어 ’파르마콘‘은 철학자 플라톤이 ‘약이요 동시에 독이다. 축복이요 동시에 저주‘라는 의미로 썼다. 영어의 파머시(pharmacy, 약학)가 여기서 나왔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진리의 양약을 주었지만, 정치꾼들의 선동으로 이성이 마비된 민중에게는 죽음의 독약을 퍼주었다.
에덴동산에서 뱀으로 나타난 악령(惡靈)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다.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느님과 같이 되리라(창세기 3:5).“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는 것을 뱀은 선으로, 하느님은 악으로 판단했다. 선과 악이 부딪치는 뒤틀린 인간 역사의 시발점이다.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 썩어가는 껍데기를 벗지 못하는 나라와 사회도 생명력을 잃고 만다. 황하(yellow river in China)의 물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 외적이 침입하면 국민이 똘똘 뭉쳐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안에서 부패하고 골육상잔하면 누구의 도움도 못 받고 스스로 허물어지고 만다. 밖이 문제가 아니고 항상 안이 문제이다.
비상계엄과 탄핵심판, 군중시위와 폭동, 현직 대통령의 체포 구속 등으로 을씨년스러운 시국이다. 안으로 정녕 무엇을 폼고 있는지, 갈등과 혼란의 독 껍질을 둘러쓰고 있지 않은지, 화합과 상생의 새 몸으로 거듭나고 있는지를 깊이 성찰하는 새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2025년 을사년은 1905년처럼 을씨년스러운 독사가 아니라 치유와 상생의 해, 악령의 해가 아니라 딱딱한 껍질을 벗고 새 몸을 입는 변화와 재생의 해가 되기 바란다.
현실의 암담한 부조리를 과감히 뚫고 나가는 지혜롭고 생명력 넘치는 뱀의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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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모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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