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이 한창이던 1월 초에 많은 공연예술단체들이 예정된 퍼포먼스를 취소하고 피해자들의 고통과 연대를 같이 했다. 그중 하나가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LA 필하모닉의 협연이었다.
김선욱은 1월 9~12일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루이 랑그레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피아노콘체르토 2번을 협연할 예정이었으나 바로 하루 전에 모두 취소되었다. 그의 브람스 연주가 탁월하다고 해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되긴 했지만, 산불 피해가 정신없이 번져가던 당시로서는 어떤 무대공연도 적절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또 김선욱은 오는 6월초 ‘서울 페스티벌’에서 다시 한번 브람스 협주곡을 연주할 예정이므로 크게 낙담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 한편 재난 속에서도 일상을 되찾은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올해 전반기 디즈니 홀에서 펼쳐지는 K 클래식의 약진이다. 한 시즌에 이처럼 많은 한국인 연주자가 초청된 적이 없었다. 프로그램도 고전에서 현대까지 다양하고, 수준이 모두 세계 정상급이라는 점에서 뿌듯함과 자부심이 절로 우러나온다.
1월초 취소된 김선욱에 이어 지난 주말에는 샌프란시스코오페라 음악감독인 김은선이 LA필을 지휘했다. 2월에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라벨의 피아노독주곡 전곡을 연주하는 리사이틀(2월11일)에 이어 파보 예르비 지휘로 라벨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한다(13~15일).
4월25~27일에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협연(모차르트 협주곡 24번)이 있고, 6월3~8일 대망의 ‘서울 페스티벌’이 열린다.
작곡가 진은숙이 기획한 이 음악축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클래식 작곡가, 지휘자, 연주자들과 앙상블TIMF 등 수십 명이 참가하는 현대음악의 향연이다. 눈부신 한국 클래식 뮤직파워를 주류음악계에 소개하는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난 주말, 사흘에 걸쳐 열린 지휘자 김은선의 디즈니 홀 데뷔 콘서트는 기대를 뛰어넘는 수려하고 장대한 음악의 성찬이었다.
김은선(44)이 누구인가? 세계 음악계에서 ‘여성최초’의 타이틀을 잇달아 꿰차고 있는 조용한 거인, 2019년 샌프란시스코오페라 사상 최초의 여성이자 아시안 음악감독으로 임명됐을 때 뉴욕타임스는 김은선이 ‘일약스타’(breakout star)로서 “역사를 만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뿐 아니라 세계메이저 오페라극장에서 여성이, 그것도 아시안이 음악감독을 맡은 최초의 사례였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을 지휘하며 계속 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그녀는 최근 영국의 유명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가 운영하는 클래식 음악뉴스 ‘슬립드 디스크’(Slipped Disc)가 발표한 ‘여성지휘자 순위’에서 세계 1위에 올랐다. 현재의 위치와 과거 지휘경력, 객원지휘 등의 이력에 따라 순위를 매기는 이 리스트에서 3년 전 그녀의 순위는 21위였으니 놀라우리만큼 짧은 시간에 정상으로 도약한 것을 알 수 있다.
지휘자 김은선의 매력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크고 명쾌한 몸짓과 활기찬 에너지가 빚어내는 우아한 카리스마에서 나온다. 그녀가 LA에서 연주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로, 2019년 9월 할리웃보울 무대에 섰고, 2020년 2월 LA오페라에서 도니제티의 ‘로베르토 데브뢰’를 지휘했는데, 항상 자신감 넘치는 바톤 테크닉으로 오케스트라를 일사불란하고 리드미컬하게 리드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지난 주말 LA필하모닉의 콘서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주곡은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3번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그리고 현대작곡가 니코 뮬리(Nico Muhly)의 콘체르토 그로소(세계 초연)였다.
교향곡 3번은 라흐마니노프가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썼고 자신의 최고역작이라고 여겼으나 혹평과 몰이해 속에 오랫동안 거의 연주되지 않던 작품이다. 하지만 이날 김은선은 대범한 손길로 이 교향곡의 러시아적 장엄함을 폭풍처럼 분출하는 한편 아다지오와 스케르초 악장에서는 손에 잡힐 듯이 섬세하게 음표를 이끌며 낭만주의 거장의 마지막 작품을 생동감 넘치게 연주했다.
김은선은 이 교향곡을 지난해 2월 뉴욕 필하모닉 연주에서, 4월 최정상 베를린 필하모닉을 아시안 여성 최초로 지휘했을 때도, 또 10월에는 서울시향과도 연주했다. 아울러 이날 후반의 프로그램도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이었으니 아마도 이 작곡가의 음악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남다른 듯하다. 광시곡의 협연자는 ‘리스트의 환생’이라 불리는 프랑스 출신의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캉토로프(27)로, 이날 혼신의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협연했다.
몇 년 전 한 공연장에서 옆에 앉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다는 두 남자는 돌연 “김은선을 아느냐?”고 묻더니 자기네 오페라 음악감독을 엄청 자랑하기 시작했다. 현지에서 그의 호감도와 인기는 대단한 모양이다. 유튜브에 올라있는 인터뷰를 보면 단원들의 신뢰감이 무한하고 로컬 언론들도 칭찬 일색이다. 그녀를 좀더 자주 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LA필에 이런 지휘자가 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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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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