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요,낯설음에 다가가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여행에는 늘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갈망과 설레임과 기대가 동반된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 문화와 풍광에 접하게 되는 것은 여행지의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고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하여준다.
쿠바여행의 첫째날 워싱턴에서 마이애미까지는 2시간,마이애미에서 쿠바의 수도 하바나에 위치한 호세 마르티 공항까지는 약 1시간이 걸렸다. 호세 마르티는 쿠바독립의 아버지이다.
일찌기 16세부터 독립운동에 참여 하여 42세때 스페인군과 교전중에 사망했다. 그는 시인이기도 했는데 쿠바의 국민가요인 ‘관타나 마라’는 그의 시를 인용해 만들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그 후 쿠바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쿠바여행에서 또 조명되는 유명 인사는 헤밍웨이이다.
그는 쿠바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생애의 반이상을 쿠바에 살면서 ‘노인과 바다’ 등 유명한 저서를 많이 남겨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쿠바 곳곳에는 그의 체취를 느낄수 있는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지금도 쿠바에는 캐나다와 중남미인들에겐 인기있는 관광여행지이다.
첫째 이유는 쿠바의 물가가 워낙 싸서 ‘여행경비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1961년 미국의 대쿠바 경제 봉쇄이후 거의 개발이 안된 상태로 있기 때문에 수도 하바나가 슬로우시티(slow city)의 매력을 느낄 수 있어 힐링여행의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쿠바에는 아직도 맥도날드와 스타벅스가 없다. 쿠바는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된 후 오랜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로 남아있다가 1891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함으로써 독립을 하게 된다. 그 후 미국 자본에 의해 경제부흥을 했었는데 1959년 카스트로 정부가 반미정책을 펴고,미국 기업들의 자산을 몰수하고 국교를 단절했다.
미국에서 금주령이 내려졌던 1919년부터 1933년까지는 쿠바가 미국의 술을 즐기는 주당들의 도피처가 됨으로써,수도 하바나에는 초호화판 호텔과 카지노와 카바레가 들어서고 또 럼을 넣어만든 락테일 ‘모히도’와 ‘다이끼리’가 유명세를 탔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쿠바 ‘시가’ 또한 이들을 열광케했다.
우리들의 16박 7일 쿠바여행은 전혀 예상을 못했던 여러가지 경험을 하며 꿈같이 지나갔다.
첫째날은 올드 하바나 시티투어를 하며 1950-70년대에 미국에서 만든 형형색색의 올드카를 타고 말레콘 해안도로를 달리며 카리브해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둘쨋날은 쿠바인들의 국민댄스인 ‘살사’ 댄스를 현지인들에게 레슨을 받았다.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지금도 배급제도가 존재한다.
국가 기간산업이 전무한 상태이기에 600만명에 달하는 관광객을 위한 관광산업진흥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사회주의 속에서 고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이지만,음악과 살사댄스를 즐기며 자신들의 숙명에 순응하며 사는 것 같았다.
셋째날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세계,문화유산 지역 ‘트리니다드’에서 즐기고,현지인 집에서 민박도 해 보았다.
쿠바의 버스와 호텔 등 모든 산업이 국명이다. 그러나 최근 관광객을 위한 민박도 허락하고,작은 규모의 개인상점을 열게 함으로써 자유경제의 창구를 조금 열기 시작했다.
넷째 날은 대서양 바다를 끼고 있는 쿠바 최고의 휴양지인 ‘바라데도’에 도착하여 수영도 즐기고 해변에서 일광욕을 하며 리조트의 라이프 스타일을 즐겼다.
다섯째 날은 하바나로 돌아와 1930-40년대에 하바나에 존재했던 전설적인 사교클럽에서 ‘트로피카나’ 디너쇼도 관람하고 역사적인 모로성에서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백미는 여섯째 날 한인후손들과의 만남이었다. 우리들을 만나기 위해 쿠바 한인 후손들은 멀리는 5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와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바나의 신도심의 공원에 마련된 무대에는 태극기가 걸려있었다. 그들은 자기소개가 끝난 후에 K팝음악과 댄스로 우리를 환영했다.
참석자의 대부분이 한인 4세대 내지 5세대였지만,이 단체의 회장인 ‘마르타 임’ 여사는 88세로 한인 3세인데 아직도 할아버지와 부모님께 들은 초창기 한인 이민자들의 고단했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K팝과 댄스공연 후에 애국가와 노사연으|‘만남’을 부르기 시작하자, 우리들도 함께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만남’의 합창이 끝난후 함께 부른 아리랑은 우리 모두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죠앤 한 대표와 한국에서 항공우주 연구소장을 지낸 황보한 박사도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모국에 가본적도 없고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그들과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역시 우리 국민가요 아리랑의 힘이었다.
쿠바라는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서 고생하고 있는 그들이지만 쿠바 현지인들과 달리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기에 열심인 그들에게,우리들이 가져온 선물과 장학금을 전달하며 우리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며 그들을 격려했다.
감격스러웠던 밤-보름달이 우리들의 발길을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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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희 Lee & Associates 대표 풀턴,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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