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국 여행 공포
▶ 중 배우·모델 등 잇단 납치 피해
▶ 20대 여대생은 넉 달째 소식 끊겨
▶ “태국서 실종된 중국인 1200여명”
▶ 작년 설엔 중국인 20만명 몰렸지만 올해는 20% 급감, 여행 포기도 늘어
설 연휴 기간이었던 지난달 27일 태국 제2도시 치앙마이 국제공항. 입국장 곳곳에 화려한 중국풍 장식과 함께‘행복한 중국 설(Happy Chinese New Year)’이라는 문구가 적힌 대형 조형물이 놓여 있었다. 나라의 첫인상을 심어주는 공항뿐만 아니다. 주요 쇼핑몰과 호텔은 출입구를 붉은 등불과 춘롄(중국인들이 음력 설 대문이나 기둥에 붙이는 글귀)으로 꾸몄고, 중국 의상을 입은 공연팀은 방문객들을 위해 중국 전통 민속춤과 사자춤을 선보였다. 이곳이 태국인지 중국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수도 방콕과 치앙마이의 유명 관광지에서도 ‘중국 설’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홍보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최근에는 ‘중국 설’보다 중립적 용어인 ‘음력 설(Lunar New Year)’이나 중국 춘제(春節)의 영어 명칭 ‘스프링 페스티벌(Spring Festival)’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흐름을 모를 리 없는 세계적 관광 대국 태국이 굳이 ‘중국 설’이라는 표현을 쓴 데는 이유가 있다.
춘제 연휴(1월 28일~2월 4일)를 맞아 중국인 여행객이 대거 태국을 찾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똑같이 음력 설을 쇠는 한국과 베트남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불쾌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감수하면서까지 ‘큰손’인 중국인의 환심을 사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구애’가 무색하게도 태국 관광업 종사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중국 여행객이 크게 감소한 상태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달 28일 치앙마이에서 만난 승차 공유 플랫폼 그랩 기사 니차난 싱짜이타나팟은 “작년 이맘때는 물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중국 관광객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한국인 손님을 훨씬 많이 만났다”며 “위챗(중국 메신저)과 라인, 왓츠앱 등 다양한 모바일 메신저를 이용해 외국 관광객과 만날 약속을 잡는데 일주일에 스무 번도 넘던 위챗 이용 횟수가 요즘엔 한두 건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태국에서 중국 관광객의 발길이 눈에 띄게 뜸해진 것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태국을 찾은 중국 여행객은 연간 673만 명에 달했다.
전체 외국인 방문객(3,550만 명)의 19% 수준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지난해 음력 설(2월 8~16일) 기간에는 중국에서 무려 20만 명이 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올해 설에는 20%가량 급감한 것으로 추산된다.
중국인들이 태국을 피하게 된 것은 태국에서 발생한 배우 왕싱(31·활동명 싱싱) 실종 사건 때문이다. 중국 영화 ‘엽문3’와 드라마 ‘매괴적고사(장미의 이야기)’ 등에 출연했던 왕싱은 드라마 캐스팅 제의를 받고 지난달 3일 태국에 왔다가 태국과 미얀마 접경 지대에서 사라졌다.
그는 나흘 뒤 미얀마에서 발견됐다. 실종 당시와 달리 삭발된 채 초췌한 모습이었다. 왕싱은 태국 경찰에 자신이 중국 범죄 조직에 납치됐고, 중국인을 겨냥한 사기 수법을 교육받았다고 진술했다.
같은 달 17일에는 지난해 12월 영화 출연 제안을 받고 태국을 찾았다 실종됐던 중국 모델 양쩌치(25)가 한 달여 만에 태국·미얀마 국경 인근에서 구출됐다.
지난해 10월 태국을 여행하던 중국 여대생(24)은 미얀마와 인접한 서부 매솟에서 목격된 것을 마지막으로 넉 달 가까이 소식이 끊긴 상태다.
태국에서 실종된 중국인만 1,200명에 달할 것이라는 보도까지 나온다. 중국인 납치 사건이 잇따르자 중국 국민 배우 자오번산은 태국 방콕에서 열릴 예정이던 공연을 연기했고, 홍콩 가수 천이쉰도 투어 공연을 포기했다.
중국 관광객 예약률 15.6% 감소
유명인마저 인신매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공포와 불안이 번지면서 중국인들은 태국을 꺼리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소재 리서치회사 차이나트레이딩데스크는 지난달 13~20일 기준 태국 여행을 예약한 중국인 관광객 수가 전주 대비 15.6%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그 여파로 베트남(-7.7%) 인도네시아(-2.6%) 등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도 예약 건수가 감소하는 등 적잖은 피해를 봤다. 반면 한국을 찾은 중국인은 3.9% 늘었다.
일찌감치 준비했던 태국 여행을 포기하는 사례도 이어졌다. 태국 공영 타이PBS는 태국공항공사(AOT) 자료를 인용해 올해 음력 설 연휴 기간 예약됐던 중국발(發) 태국행 항공편 1만 건이 취소됐다고 전했고, 글로벌 여행분석회사 포워드키스는 1월 셋째 주 주말(18, 19일) 중국에서 태국으로 가는 항공편 취소 건수가 전년 대비 155% 늘었다고 밝혔다.
티엔프라싯 차이야파트라눈 태국호텔협회 회장은 현지 매체 네이선에 “올해 1월 1일부터 21일까지 태국 전역에서 호텔 객실 예약 1만2,400건이 취소됐다”며 “중국인 실종 사건의 영향이 올해 내내 심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태국 여행 취소하는 법’이나 ‘취소 시 환불 여부’ 같은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4일 중국판 인스타그램 샤오홍슈에 ‘태국이 안전한가’라는 검색어를 입력하자 관련 게시물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지난 한 달간 이 플랫폼에 올라온 관련 콘텐츠는 40만 개가 넘었다.
한 이용자는 실종 사건을 다룬 영상에 “방금 춘제 연휴 기간 가족 모두의 태국행 항공권과 호텔 예약을 취소했다.
손해액이 1만 위안(약 199만 원)에 달하지만 그 돈이 아깝지 않다고 느껴진다”는 글을 적었다. 여기에 또 다른 이용자는 “가족의 목숨은 1만 위안보다 훨씬 소중하다”는 댓글을 달았다.
태국 남부 대표 관광지 파타야 지역 매체 파타야메일은 “올해 음력 설 기간 파타야를 찾은 사람이 작년보다 30%나 줄었다”며 “중국인으로 북적거렸던 핫플레이스는 소름 돋을 정도로 조용해졌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여행 예약을 취소하지 못해 태국 땅을 밟긴 했지만, 가족이 걱정할까 차마 말하지 못하고 몰래 다녀왔다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납치 범죄 가해자가 같은 중국인이라는 점도 중국 관광객의 경계심을 높이고 있다. 방콕으로 여행을 온 중국 관광객 후양판(25)은 AFP통신에 “중국어를 하는 사람들과 너무 많이 말을 섞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큰손’ 중국인들이 등 돌리면서 태국에는 비상이 걸렸다. 지난해 태국에서 관광 부문이 창출한 수익은 500억 달러(약 72조1,500억 원)가 넘는다. 태국 국내총생산(GDP)의 10%를 웃돈다. 그 가운데 음력 설 연휴 기간 벌어들인 관광 수익만 10억 달러(약 1조4,430억 원)에 달한다. 잇단 납치 사건으로 관광 대국 이미지가 훼손된 것은 물론, ‘대목’도 놓친 것이다.
태국 정부는 ‘여행객 안전을 보장하겠다’며 적극 진화에 나섰다. 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는 지난 5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베이징에서 만나 “관광객 안전은 태국 정부 최우선 순위”라며 납치 범죄 근절을 위해 중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패통탄 총리는 하루 뒤 중국 국영 차이나데일리 인터뷰에서 자신이 화교 출신인 점을 언급하며 “나에게는 중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태국이 중국인들에게 매우 안전할 것이라고 보장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음력 설 당일인 지난달 29일에는 태국 관광·스포츠부 장관과 관광청 청장, 관광경찰청 청장 등 관련 정부 인사들이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찾아 중국에서 입국하는 관광객들에게 환영 선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태국 내 중국인 관광객의 빈자리는 한국인이 채우는 분위기다. 태국관광청은 올해 1월 1일부터 26일까지 치앙마이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한국인이 3만4,954명으로, 중국인(3만4,894명)을 넘어 최다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올해 연간 기준으로도 한국 관광객이 중국을 앞지를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한 해 치앙마이를 가장 많이 찾은 외국인 관광객 국적은 중국(32만6,651명)이었다. 한국인(28만3,681명)이 그 뒤를 이었다.
상대적으로 선선한 기후와 저렴한 물가로 짧은 여행은 물론 ‘한 달 살기’ 등 장기 거주에 나선 한국인이 늘어난 영향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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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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