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형, 이곳의 봄은 어느새 뜰 앞에 와 있는데 서울의 봄은 냉기가 만만치 않다고 전해옵니다. 고국의 정세가 계속해서 거센 풍랑 속에 현기증이 날 정도라고 하니 참 기분 잡치네요.
옛날 선비들은 시국이 어지러우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라고 탄식했습니다. K 형이 술자리에서 가끔 읊었던 심훈(본명 심대섭)의 왜정시대에 쓴 ‘조선은 술을 먹인다’라는 애국 저항시가 떠오릅니다.
“조선은 마음 약한 젊은 사람에게 술을 먹인다…(중략)/ 아편 대신으로 죽음 대신으로 알코홀을 삼킨다. /가는 곳마다 양조장이요, 골목마다 색주가다/ 카페의 의자를 부시고 술잔을 깨뜨리는 사나이가/ 피를 아끼지 않는 조선의 ‘테러리스트’요/ 파출소 문 앞에 오줌을 갈기는 주정꾼이/ 이 땅의 가장 용감한 반역아란 말이냐?/ 그렇다면 전봇대를 붙잡고 통곡하는 친구는/ 이 바닥의 비분을 독차지한 지사로구나…(하략)”
K 형, 왜정 때는 나라를 잃은 분노로 젊은이들이 비분강개하여 술로 세월을 달랬지만 지금은 상대가 같은 민족이니 더욱 기가 막합니다. 국내에는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점점 더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해외에서 대략적인 분위기만 감지하더라도 더욱 엄청난 사태가 야기될 것만 같습니다. 헌법재판에서 탄핵이 기각되든 인용되든 어떤 충돌사고가 발생할지 정말 조마조마 걱정이 앞섭니다.
K 형, 일제시대 청년들은 술 마시는 것으로 분노를 삭혔지만 오늘 국내 정치인들의 작태로 빚어지고 있는 이 더럽고 무례한 만행은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 건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고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K 형, 이럴 때는 양심세력이 등장하여 난국에 처한 나라를 수습할 시간인데 아직 소식이 없군요. 우리 정치인들은 백성을 물에 비교한 경고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은 막히면 돌아가지만 넘치면 둑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라는 경구를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K 형, 세상이 진보, 보수 철지난 이념 논쟁으로 정신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소위 팬덤 정치가 성행하여 진영 간의 대결이 심화하고 있습니다. 지역감정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아 화해의 길은 점점 멀어져 가고만 있는 것 같습니다.
K형, 오늘 저녁엔 술이 잘 당길 것 같습니다. 일제시대 우리 선배 지성들은 일제의 압박을 술로 삭혔다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방종이 멋으로, 심지어는 미덕으로까지 용인되었던 것 같습니다.
영문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수주 변영로 선생의 저서 ‘명정 40년’(酩酊 40年: 술 취해 비틀거리며 살아온 40년)을 학생시절에 읽은 기억이 나는데 내용을 회상해 보니 그 당시 지성들의 시국에 관한 고뇌와 분노와 슬픔이 얼마나 사무쳤었는지를 공감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변영로 선생은 저 유명한 염상섭, 오상순, 이관구 등 쟁쟁한 문인들과 어울려 성북동 산골짜기에서 술을 마시고 옷을 벗은 채 소를 타고 혜화동 로터리까지 내려와 가족들이 데려갔다는 일화도 기술하고 있습니다.지금 같으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었겠지만 모두가 시국 반항아들의 객기쯤으로 치부되었겠지요. 그러나 동족 사이비 정치인들의 난동 행패 아래 살고 있는 우리들의 냉가슴 앓이 답답함은 어떤 수단으로 해소해야 하는 건지 호소할 길이 없네요.
중도에 서서 바른 말을 하자니 보수, 진보 양쪽으로 부터 태클이 들어옵니다. 좌우충돌을 완화, 화합시킬 수 있는 완충력이 전무한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너무 나간 말씀 같지만 한 길만 걸어온 나 자신도 피로감이 밀려오고 맥 풀림을 감출 수 없군요. 방정맞은 말인지 모르겠지만 국내 정치 싸움에 찬반 데모가 너무 격렬하여 유혈 참극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걱정으로 술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요즈음엔 종종 평화스런 봄날, K형과 함께 노래 부르며 즐기던 그 시절 생각이 저를 유혹하곤 합니다. “푸른 잔디 풀 위로 봄바람은 불고 아지랭이 잔잔히 낀 어떤 날 나물 캐는 처녀는 언덕으로 다니며…”,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그런 노래보다 술이 거나해지면 그 시절에 파격적으로 앞서 나갔던 황진이의 개방 시 한수로 고뇌를 달래 봅시다.
“동지섣달 기나긴 밤 한 허리 버혀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시는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K 형, 한가하게 형과 마주앉아 평화, 축복의 자리에 함께 잔을 들어 올리는 시간이 올까요. 그런 황홀한 순간을 그려봅니다.
(571)326-6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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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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