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성 버리는 미 기업들
▶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건 기점
▶ “흑인·히스패닉 등 다양성 우대”
▶ 실리콘밸리 기업들 DEI 적극 도입

메타의 2022년도 다양성 보고서 표지 이미지. 다양한 인종의 직원들이 모여 일하는 모습을 담았다. [메타 제공]
2019년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을 운영하는 미국 빅테크(거대 기술기업) 메타가 인력 다양성 증진을 위한 3대 목표를 발표했다. 향후 5년 동안 △여성 및 흑인, 히스패닉 직원 수를 두 배 늘리고 △2024년까지 직원의 50%를 ‘백인 남성’ 이외의 다양한 인구 구성으로 채우며 △미국 내 간부 이상 고위급 직원 그룹 내 유색 인종 비율을 30%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었다.
‘워크’거부하는 트럼프 당선되자
“소수자 아닌 사람에 대한 역차별”
메타·구글·아마존 등 DEI 줄폐기그로부터 2년 뒤인 2021년 7월, 메타 최고다양성책임자(Chief Diversity Officer·CDO)인 맥신 윌리엄스는 △고위급 직원 가운데 흑인이 1년 새 38% 늘어났고 △전 직원 중 여성, 흑인, 장애인 등 비(非)백인 남성 비율이 45.6%를 기록했다고 소개했다. 순조롭게 목표 달성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회사의 다양성 확립 노력에 뿌듯함을 드러내며 그는 덧붙였다. “5년 내 목표 실현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는 글로벌 이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대표성 증진을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5년’이 지나자마자, 메타는 그간 추진해 온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목표를 폐기했다. 지난달 10일 “앞으로는 대표성 목표를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직원들에게 공지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의 직접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메타의 인사 담당 부사장 자넬 게일은 “DEI라는 용어 자체가 논란을 낳고 있다”며 “일부에서는 특정 그룹에 대한 특혜로 인식된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DEI 프로그램을 ‘소수자가 아닌 이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여기는 보수 진영 주장을 감안한 조치라는 얘기였다.
메타는 이와 함께 미국 내 콘텐츠 사실 확인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혐오 발언 검열·제한도 완화하기로 했다. 그 결과 메타의 플랫폼에서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를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허용되기 시작했다. 2013년부터 11년 넘게 CDO를 지내며 메타의 5개년 다양성 목표를 세웠던 윌리엄스의 직책도 1월부로 ‘접근성 및 참여 담당 부사장’으로 변경됐다. 마치 작정한 듯, 메타는 ‘다양성’과 ‘DEI’ 같은 용어를 회사 문화에서 말끔이 지워냈다.
▲빅테크들, 경쟁하듯 ‘DEI 손절’
새해가 밝으면서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업들의 DEI 프로그램 축소 혹은 폐기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다. 구글 역시 지난 5일 “더 이상 인력 구성의 다양성을 개선하기 위한 채용 목표를 설정하지 않을 것”이라며 채용 시 소수자를 우대하던 정책을 사실상 없애겠다고 밝혔다. 아마존도 공식 발표는 없었지만, 내부적으로는 DEI 프로그램 전면 재검토에 착수하고 관련 예산을 감축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다양성 목표에서 후퇴하는 게 아주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미 2023년 6월 대학의 ‘소수 인종 우대 정책(어퍼머티브 액션)’에 대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위헌 결정이 나온 이후부터 미국 기업들 사이에선 DEI 정책 축소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나 이런 기류가 본격화한 건 지난해 11월 미국 대선 전후다. 이른바 ‘워크(woke·진보적 가치와 정체성을 강요하는 행위라는 비난성 용어)’를 거부하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현 대통령)가 당선되면서, 한때는 경쟁하듯 다양성 목표를 상향하고 나섰던 기업들이 제대로 표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선 기미 인적 다양성 다시 악화
“정치적 이익 탓 다양성 노력 중단
실리콘밸리 미래 경쟁력에 악영향”▲5년 전엔 앞다퉈 DEI 프로그램 확대
5년 전만 해도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2020년 5월 발생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기점으로 DEI 프로그램은 실리콘밸리에서 ‘유행’이 됐다. 이 사건 이후 미국에서 대규모 인종차별 반대 시위 ‘BLM(Black Lives Matter·흑인 목숨도 소중하다)’가 확산하자, 미국 내 기업들은 너나없이 다양성 강화를 위한 계획을 제시하고 나섰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특히 적극적이었다. 역설적으로 다양성이 가장 부족한 곳이 바로 실리콘밸리였기 때문이다.
2022년 미국 인구조사국 발표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전체 인구 가운데 흑인 비율은 2%였다. 그해 미국 전체 인구 중 흑인 비율이 약 14%였던 것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과소대표되고 있는 셈이다. 2012년 통계와 비교해 1%포인트도 늘어나지 않았다. 히스패닉 비율은 18%로, 전국 평균(19%)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주류라고 볼 수 있는 기술직 비율은 흑인이 2%, 히스패닉은 6%에 그쳤다. 미국 수도 워싱턴DC 내 테크업계의 경우 기술직의 18% 정도가 흑인이라는 사실과 비교할 때, 인력 구성의 불균형은 실리콘밸리 테크업계에서 유독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실리콘밸리 다양성 결여 원인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고질적인 다양성 부족의 원인을 ‘적은 공급’ 탓으로 돌린다. 컴퓨터과학을 전공한 흑인이나 히스패닉 학생 자체가 적기 때문에 이들의 채용 비율도 낮을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미국 전체 컴퓨터과학 전공생 가운데 흑인 비율은 이미 2010년대부터 10%가 넘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다.
그보다는 ‘실리콘밸리 자체가 다양성이 강화될 수 없는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특정 명문대 출신 인재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워낙 강하다 보니 문제가 쉽게 개선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리콘밸리 빅테크들은 컴퓨터공학과의 경쟁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스탠퍼드, 카네기멜론, 메사추세츠공과대(MIT) 같은 유수 대학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인력을 채용하고 있는데, 이들 대학의 흑인 졸업생 비율(6~8%)은 미국 평균 비율(14%)보다 한참 낮다.
게다가 대부분의 채용 과정을 ‘기존 직원의 추천’에서 시작하는 실리콘밸리의 특성도 다양성을 억제하는 요인이다. 백인 직원의 90%는 백인을 추천하고 있어서다. 초기 직원 구성이 백인 중심이라면 ‘백인 주류 문화’가 계속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이런 분위기는 소수 인종 졸업생들 스스로 실리콘밸리를 기피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후안 길버트 플로리다대 교수는 “흑인 학생들은 실리콘밸리보다 (흑인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 워싱턴이나 애틀랜타 같은 지역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며 “실리콘밸리에선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에 말했다.
▲ “DEI 폐기, 경쟁력에 장기적 손실”
2020년 전후 빅테크들이 추천 기반 채용을 줄이고 소수자 우대를 적극 적용하면서 실리콘밸리의 다양성 부족 문제도 소폭이나마 개선됐다. 구글의 경우 2019년에는 미국 전체 직원 중 흑인 직원이 3.6%밖에 되지 않았으나 지난해에는 6%를 기록했다. 하지만 DEI 목표가 축소 또는 폐기되면서 ‘인적 다양성’도 다시 악화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부 기조 자체가 ‘DEI 폐기’인 만큼, 기업들이 그에 발맞춰 움직이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정책적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은 주주들에 대한 기업의 의무이기도 하다. 주로 정부 관련 사업을 하는 기업들로선 DEI 프로그램 유지에 대한 부담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적 이익 때문에 다양성 증진 노력을 중단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실리콘밸리의 경쟁력을 해칠 수 있다는 분석이 적잖다. 능력 있는 소수자들이 채용 기회를 잡기 어려워 진입조차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 일하는 조직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협력하는 조직보다 생산성이 작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어렵게 자리 잡은 DEI 프로그램이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자, 소외계층 출신 혹은 그들을 돕던 이들의 한숨도 깊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약 67만 명의 소외계층 학생들에게 무료 코딩 교육 등을 제공한 비영리단체 ‘걸스 후 코드(Girls Who Code)’의 창립자 레시마 사우자니는 “DEI는 원래 기회 제공의 문제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좌파 운동으로 낙인찍혔다”고 워싱턴포스트에 말했다. 컴퓨터 관련 교육 접근성 증진 등을 위해 일하는 비영리 단체 ‘코드2040’의 전 최고경영자 카를리 몬테로소도 “우리는 흑인과 히스패닉 인재가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다시 싸울 수밖에 없게 됐다”며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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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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