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낙 좁은 계곡이라 큰 여객선은 못 들어온다. 날씨변화가 워낙 변화무쌍한 지역이라 화창한 날씨가 연중 며칠 안 된다는 선장의 메시지가 방송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오전에는 구름안개, 정오에 개인 날씨는 오후에는 눈보라가 휘날렸다.
옛부터 세상이 어지러울 때 군자들은 속세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갔었다. 율곡은 19세 나이에 산으로 들어갔고, 미국 초기 지성을 대표하는 헨리 소로는 보스턴을 떠나 월든 호수 숲속에서 “자연에서 사회를 발견”한 후 사회적 행동주의를 부르짖으며, 진정한 민주주의란 노예제도와 같은 부조리한 정부에 대항하는 시민 불복종 철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에머슨과 함께 위대한 초월주의자로서, 후대의 톨스토이, 간디, 킹 목사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수도인 워싱턴 D.C.는 정치적으로 조용할 수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 대통령 취임식이 있는 날, 이역만리 뉴질랜드 남부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에 도착하니 도저히 같은 세상에 있지 않은 듯 느껴졌다. 왜 옛 성인들이 사회를 등지고 자연 속에서 그들만의 철학관을 정립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알래스카와 마젤란 해협 크루즈보다 한수 위·저세상 풍경, 자연 예술의 극치>
신과 자연이 창조한 경이로운 대자연의 향연만을 논한다면, 알래스카 크루즈와 칠레 피오루 크루즈에서 경험했던 감성과 경이로움의 합창보다 이번 뉴질랜드 남부 섬에서 본 대 서사시적 경험이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마치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으로 옮겨온 느낌이다.
호주에서 길고도 긴 태즈매니아 바다를 7일에 걸쳐 뉴질랜드로 이동할 때만 해도 밀포드 사운드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있기보다 식사 챙기고 저녁 밤무대 정도에 관심이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지루한 항해 끝에 눈앞에 전개된 경이로운 대심포니의 시작은 칼로 깎아낸 듯 수백 미터에 달하는 절벽들과 그 위를 장식하는 쇠톱의 날카로운 이빨같이 섬뜩하게 느끼게 하는 상아의 봉우리들, 신과 대자연의 협주곡의 별미를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알버트 비어스타트, 토머스 콜 같은 대자연을 실물보다 멋지게 표현한 대 화가들이라도 이 풍경을 한 폭에 담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자연마저 도태시킨 뉴질랜드, ‘키위’화된 인간사회>
바닷가임에도 한 마리 나는 새조차 허용하지 않는(뉴질랜드의 키위새는 날개가 도태되어 날지 못 한다—인간도 자신이 위치한 사회에 적응하고 순응하다보면 영원히 도태되어 인간성마저 소멸될 수 있다. 마치 북한 주민들처럼.) 이 철옹성의 생추어리에서 나의 가슴을 후려치며 들려오는 저 머나먼 태고적부터의 부름소리…숨을 죽이고 귀 기울여 듣는다. “우~엉, 우-~엉.” 저 높은 봉우리에서 불어오는 저음의 울음소리. 이 대자연에서 쫓겨난 마오리족 옛 추장의 울음소리인가?
“계곡의 풍음이 특이하네”하며 아내가 속삭인다. 그 순간 “와우! 돌고래(돌핀)!”하며 한 여인의 목소리가 정적을 깬다. 우르르 승객들이 한쪽으로 몰리고, 흰등 돌고래 무리가 하얀 파도를 만들며 여객선과 경주를 한다. 인간이 자연에 있지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듯이.
<선상의 샤도네 와인은 얼음 속보다 시원하고>
양옆으로 하늘 끝까지 치솟은 화강암의 병풍은 폭이 불과 몇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여서 손을 뻗으면 손끝에 닿을 듯 느껴진다. 선장은 폭이 좁아도 수심이 깊으니 안심하라고 조언한다. 수백만 년에 걸쳐 지구의 구조판(tectonic plate)의 이동과 엄청난 무게의 빙하 움직임으로 만들어진 피오르드랜드의 눈부신 자태는 그 어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경이로운 모습이다. 1904년 국립공원으로 내정되고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크루즈 여행의 백미로 알려지게 된 이곳. 배 선상 위에서 들이키는 샤도네 와인은 얼음 속보다 시원했다. 약 10마일가량 계곡을 따라 진입하니 끝자락이 나오고, 앞으로는 마천루처럼 높이 솟아오른 산봉우리 위에 햇살에 빛나는 빙하들이 왕관처럼 반짝인다.
<반지의 제왕,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힐러리 경>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 산도 뉴질랜드 출신 힐러리 경이 정복했는데, 그만큼 뉴질랜드의 드높은 선봉우리들은 현지인들에게는 등산을 익숙하게 하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정상에 오르면 느끼는 그 홀가분함을 우리는 모두 이해한다. 그 홀가분한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뉴질랜드의 멋진 풍경은 이곳 출신 감독 피터 잭슨이 메가폰을 잡고 연출한 ‘반지의 제왕’에서 멋들어지게 영상화되었는데, J.R.R. 톨킨의 원작을 뛰어넘은 듯 느껴진다. 그리고 보면 3부작 영화에 등장하는 ‘알라곤’ 같은 멋진 영웅호걸들에 비해 너무나 별 볼일 없는 난쟁이들인 ‘호빗’들에게 주어진 엄청난 임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을 의미하는 반지, 그 엄청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부작용은 무엇인가? 왜 돌려주어야 하는가? 왜 가질 수 없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호빗’들에게 주어진 의무와 벗어 던져야 하는 반지>
작금의 세상사를 보면 ‘통제 불가능’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다. 동네 정치든 국가 공동체를 짊어진 권력의 정점에서든 왜 권력을 쥐려고할 뿐 홀가분하게 내려놓지 못할까? 반지는 손에 끼는 순간 올가미를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남편들이 반지를 끼지 않는다.
민주공화제 아래에 시민들은 난쟁이 ‘프루도’다. 우리 모두 우여곡절의 사연들이 있으며, 남에게 말 못할 욕망과 욕정들이 마음속에 꿈틀거리기에 뜬금없이 복권도 사고, 증권에 투자도 하고, 사고도 친다. 그럼에도 원대한 숙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허망한 꿈을 꾼다. 사실 우리 모두 그 원대한 숙명 속에 살고 있다. 긴 수염을 달고 지팡이를 든 현자 간돌프 노인이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을 뿐, 우리 모두 시민 ‘프루도’다. 우리에게는 선택권과 ‘소로‘가 말한 행동의 철학이 손아귀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작고 연약한 ‘호빗’들에 대비되는 이 광월한 자연, 아무리 미약한 우리 삶이라도 그 주체는 우리이며 위대한 위인들과 같이 빼어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톨킨과 잭슨은 말했던 것 같다. 빙하와 함께 비상하는 듯한 계곡, 대자연의 장대함 또한, 이 경이로움에 탄성을 외치는 관광객들의 찬사가 없다면 외롭게 소외된 자연의 한 모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둠은 빛의 부재>
대자연속에서도 세상사만 머리에 떠오른다. 왜소한 ‘호빗’들이 대항하는 ‘사오론’은 우리가 추종하는 우상일 수도 있다. 마치 북한의 김정은, 중국의 시진핑, 러시안의 푸틴같이 독재자를 추종하는 세력은 존재한다. 계곡 밑은 한낮인데도 어두웠고 뱃머리 바람에 추웠다. 결국 어둠은 빛의 부재라는 결론에 이르니 자리를 옮겨 햇살이 비추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뉴질랜드 깊고도 깊은 빙하의 산맥 정중앙에 서서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며 우리 ‘호빗’들의 얼굴에 타스한 햇살이 비추길 기원한다.
<
제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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