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패션계의 대모(代母)로 “그레”라는 분이 있었다는데 이름이 확실치는 않다. 그녀는 그레이스 켈리, 재클린 케네디 여사를 위해 의상을 만든 것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최후는 아무도 몰랐다.
그녀가 늙어가던 어느 날 사람들의 눈앞과 뇌리에서 사라졌고 몇 년 후 겨울, 파리 근교 양로원에서 91세로 영면했음이 뒤늦게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한결같음을 칭송했고 모두의 관심에서 떠나 자신의 늙음을 홀로 간수하다가 홀연히 사라진 깨끗함을 오히려 그리워했다.
이와 비슷한 여인이 또 있다. 한 세대를 주름잡았던 은막의 여왕 그레타 가르보, 그녀는 더 일해도 괜찮을 나이인 50대 초반에 은퇴를 하고 스크린을 완전히 떠나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85세에 사망했다.
이들은 모두 노파(老婆)를 거부했다. 거부한다고 노파가 안 되는 것이 아닌데도 최소한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발로다. 그런 결심과 태도가 꼭 옳은 것은 아니지만 나름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인생은 반드시 늙게 되어있다. 그래서 삶을 방문하는 늙음은 엄숙한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늙으면 추레해진다는 사실이다. 삶을 정리할 때가 되면 인간의 존엄한 자태와 품위가 나타나야 마땅한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하여 늙음을 표현하는 말들을 보면 유쾌한 말이 거의 없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은 노추(老醜)다. 늙으면 추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단장해도 자기는 깨끗하나 남들 눈에는 거기서 거기다. 노망(老妄)은 어떤가. 이 시대의 골칫거리는 늙은이들의 치매다.
전에는 한동네에서 노망난 노인이 한 둘이었는데 백세시대라는 이 시대의 트레이드마크는 누가 뭐래도 치매다. 장수(長壽)의 값으로 받았으니 마냥 화를 낼 수도 없다.
다음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노욕(老慾)이다. 늙으면 지난날을 회고하며 베푸는 삶으로 대미를 장식할 것 같은데 노인들의 욕심은 못 말린다.
근간 어느 신문을 보니 노인들이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다 쓰고 죽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내놓고 다 쓰겠다니 다소 처연함이 없지 않다. 아예 말을 하지 않고 다 쓰기를 추천한다.
써봤자 그 나이에 쓸데도 딱히 없다. 여행도 두 다리에 힘이 있어야 다니고 다녀봤자 새로울 것도 없음을 곧 알게 될 터이니. 치아도 부실하여 갈비 먹기도 쉽지 않고 늙은 몰골 주변엔 꽃도 없고 나비도 없다.
한푼 두푼 모아 쌈지 돈을 만들어, 그 돈을 다 쓰겠다고 나서면 괜히 자식들한테 실없는 부모가 되기 십상이다.
다른 말 다 제켜두고 노인의 추한 모습 중 으뜸은 단연 노염(老炎)이다. 나도 늙은이에 속하는지 노(怒)가 많고, 심중에 화(火)가 많다. 별 것 아닌 일에 화를 내는 경우가 늙어가는 속도에 비례한다. 금세 후회를 하고 반성을 하면서도 왜 그렇게 참지 못하는지 용렬한 자신을 보며 또 분노하게 된다.
왜 그럴까. 왜 나이가 들면 철이 들어야하는데 추해지고 욕심꾸러기가 되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화를 잘 내는 걸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진리를 증명하려는 것일까. 지천명을 지내고 이순을 거쳐 고희의 언덕 즈음에 올랐으면 어느 날 종적을 감춘 모세를 기억할 일이다.
어느 선각자가 말했다. “바보가 되어라. 바보가 되는 데서 참 사람이 나온다.” 늙으면 바보가 되는 것이 맞다. 노염을 줄이고 노욕을 줄이고, 하루하루 바보로 가는 길 위에 서있음을 깨닫고 침묵을 선호해야 된다.
노년에 이를 때까지 분주하게 다녔지만 얻지 못한 게 더 많지 않은가. 매사를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턱없이 잘난 척하며 그러다가 어이없이 늙어버린 자화상 앞에 서있어야 한다.
그러나 혹시 이 글이 늙은이들에겐 많이 언짢을 수 있다. 노년의 특징 중 하나가 협량(狹量)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칩거(蟄居)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바보가 되기엔 너무 잘난 자기를 버리기 아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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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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