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의 마지막 날’ 김호성 동백성루카병원 진료과장
▶ 삶은 순간과 순간이 이뤄진 과정
▶ 고통스러워도 환희의 시간 쌓이면 환자들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해
의사 조력 자살 논의 늘었지만
자기결정권 아닌 열악한 돌봄 탓
끝까지 삶의 질 챙겨주는 게 중요경기 용인의 천주교수원교구 동백성루카병원 2층 로비에서 이달 5일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관객은 환자와 보호자들. 이곳은 독립형 호스피스 병원이다. 독립형은 대형병원에 속해 있지 않은 완화의료 전문 병원이라는 뜻. 말기 암 환자들이 마지막 시간을 보내러 온다. 입원 환자는 평균 3주 만에 숨을 거둔다. 한달을 넘기는 환자는 25% 미만. 1년에 약 300명이 임종을 맞는다고 하니 하루에 한 번은 죽음이 일어난다.
죽음이 그토록 가까이 있는데도 환자와 보호자들은 미소 짓고 있었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말기 환자가 남은 하루하루를 ‘일상’처럼 평온하게 보내도록 하는 것이 이 병원이 하는 일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어차피 죽을 사람’이 아닌 ‘똑같은 사람’으로 대우한다. 치료는 포기해도 환자의 개성과 욕구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의료진은 의학기술로 생명을 연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돌봄으로 삶의 질을 올려 주는 사람이다.
김호성 진료과장은 10년째 ‘임종 돌봄’을 하는 의사다. 영상으로 병을 진단하는 핵의학 전문의였다가 전공을 바꾸었다. 병 치료가 목적인 일반병원에서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말기 환자들을 보며 회의를 느껴서다. 그는 수천 명의 임종을 돌보았다. 어느 크리스마스 당직날엔 7명을 떠나보냈다. 말기 돌봄 현장의 고민을 나누려 ‘나는 평온하게 죽고 싶습니다’(공저·프시케의숲 발행)를 썼다. 책은 ‘좋은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그에게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물었다.
#사례 1. 돈을 벌러 온 옌볜 출신 젊은 말기 환자가 있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화만 내고 거칠게 굴었다. 병원 직원들이 설득해 휠체어에 태워 벚꽃 구경을 나갔다. 통증 조절을 비롯한 복잡한 준비부터 단단히 했다. 흩날리는 꽃잎을 오래도록 보고 난 뒤 그의 얼굴이 마침내 풀렸다. 마음도 녹았다. 며칠 뒤 평안 속에 눈을 감았다.
Q. 왜 그 환자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나요.
“고통스러운 생의 소멸 과정에서도 환자에게 환희의 순간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요. 그런 우연한 순간들이 쌓이면 말기 환자들이라도 ‘힘들지만 삶은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그게 호스피스가 추구하는 겁니다. 삶은 결과가 아니고 순간과 순간으로 이루어진 과정이니까요.”
#사례 2. 어느 환자는 죽음을 기다리는 걸 지루해했다. 가족과 작별의식도 다 치렀는데 기력이 뚝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죽여달라”더니 갑자기 짜장면 생각이 난다고 했다. ‘소화가 될까’ 하는 걱정보다 중요한 건 그가 지금 이 순간 느낄 효용이었다. 짜장면을 허락받은 그는 누구보다 맛있게 먹고 기운을 냈다.
Q. 호스피스에서도 음식에 큰 의미를 두는군요.
“말기 환자가 잘 먹거나 못 먹거나 사실 큰 차이는 없어요. 기력 회복이 아니라 삶의 질을 위해서예요. 말기 환자도 사람입니다. 욕구와 개성이 있어요. 살날 얼마 안 남은 사람이 먹고 싶은 게 있다는데 막아야 할까요? 의학이 아닌 상식의 문제입니다. 먹는 행위 자체가 공동체에 여전히 속해 있다는 소속감도 주고요. 환자가 사망하면 깨끗이 씻긴 뒤 생전에 좋아하던 옷을 입히는 것도 개성을 끝까지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Q. 호스피스 병원에서 삶과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좀 다르네요.
“일반병원에서 죽음은 삶의 반대말이죠. 피하고 지연시켜야 할 대상이에요. 호스피스에선 죽음을 삶의 일부로 봐요. 그래서 죽음의 질도 중시하죠. 의사에게 사람 살리는 보람만 있는 건 아니에요. 치료가 목적인 병원에서 말기 환자는 포기당하는 존재이지만, 호스피스에선 어엿한 사회구성원으로 환대받습니다. 주체적으로 일상을 살아가도록 돌보지요.”
Q.죽음을 코앞에 두고 일상을 누리는 게 가능한가요.
“통증을 조절하면 마지막까지 삶의 연속성과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어요. 과거엔 ‘죽을 사람이니까 아픈 게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그게 아니죠. 아파서 당장 죽고 싶다는 환자도 통증이 줄어들면 달라져요. 살고자 하는 본능이 살아나서 ‘내일 뭐 하지, 뭐 먹지’를 고민하죠. 삶의 기쁨이 연장되는 거예요. 방법이 있는데도 ‘아프면 참지 않고 스위스 가서 의사 조력 자살할 거야’라는 분들이 안타까워요.”
Q. ‘덜 고통스러운 죽음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호스피스와 의사 조력 자살이 비슷하지 않나요.
“철학 자체가 달라요. 최근 의사 조력 자살 논의가 급격히 늘어난 건 열악한 돌봄 시스템 때문이에요. 자기결정권 존중 차원이 아니죠. 우리 사회는 사람의 효용을 자율성으로 판단해요. 혼자 거동하지 못하면 죽어야 하나요? 아니죠. 사람은 본래 서로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도움이 필요한 말기 환자에게 ‘죽는 길을 빨리 열어주자’와 ‘삶의 질을 끝까지 챙겨주자’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성숙한 사회일까요. 호스피스를 두고 의사 조력 자살부터 선택하는 건 말리고 싶어요. 통증은 조절하면 좋아집니다. 그래서 해외에선 환자 상태를 보고 호스피스 의사들이 의사 조력 자살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아요.”
Q. 그럼에도 호스피스는 ‘죽으러 끌려가는 곳’이라는 두려움이 여전합니다.
“인간이 죽음을 싫어하는 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덜 두려워지기를 바랄 뿐이죠. 다만 말기 환자가 언제 호스피스로 오는지가 남은 날들의 질을 좌우한다는 건 기억해 주세요. 너무 늦으면 삶의 질 향상을 느낄 수 없어요. 의식이 없어지니까요. 호스피스를 ‘임종을 맞는 장소’ 정도로 보고 상급병원들이 환자를 늦게 보내기도 해요. 의사들의 직업윤리와 환자를 포기했다는 미안함 때문이죠. 중요한 건 환자, 보호자, 의료진이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는 겁니다.”
지나간 일 후회하는 환자 적어
영영 알 수 없게 된 미래 아쉬워해
준비되고 고통 줄일 시스템 필요Q. 마지막 순간은 환자들에게 어떤 단계로 찾아오나요.
“평균 3주의 입원 기간을 기준으로, 통증이 감소하고 삶의 질이 올라가는 1, 2주를 안정기라 부릅니다. 그 기간엔 ‘의미의 폭풍’이 닥쳐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겠는데, 어쩔 줄 모르는 환자가 많아요. 이후 잠에 빠지거나 섬망이 일어나 의사소통이 어려운 1주 동안의 불안정기, 그리고 마지막 1, 2일의 임종기를 거칩니다. 평소 존엄한 죽음을 고민했다는 분들도 임종의 모습에 대해선 유독 관심이 없더군요.”
Q. 미리 고민하고 준비할수록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쉬워지나요.
“‘나 준비 많이 했어. 보란 듯이 잘 갈 거야’ 하는 분 중에 정작 잘 마무리하는 분이 많진 않아요. 오히려 기대를 낮추고 오는 분들이 잘 지냅니다. 내려놓는 게 좀 더 쉬우니까요. 또 사회적 관계가 좋은 분일수록 편안한 시간을 보냅니다. 여기서도 끝까지 사회생활을 하다가 살아온 모습대로 떠나지요.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고민의 깊이가 죽음의 질을 좌우하진 않아요. 누구의 돌봄을 받고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가 결정적입니다. 잘 죽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정말로 잘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Q. 성별, 소득, 교육수준 등에 따라 죽음을 맞는 모습이 다르기도 한가요.
“학력이나 소득수준과는 인과성이 없는 것 같아요. 나이가 많을수록 성별 차이는 있습니다. 여성이 호스피스에 더 수월하게 적응합니다. 서로서로 의존해야 유지되는 공동체의 돌봄 환경에 익숙하기 때문일 거예요. 남성들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생활이 가능하다는 현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해요. 죽음을 부정하는 경우도 많고요. ‘가장인 내가 사라지거나 자율성을 상실하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와서인 듯합니다.”
Q. 죽음이 임박하면 다들 화해하고 용서하나요.
“드라마나 영화 속 얘기죠. 가족이 죽는다고 누구나 슬퍼하지도 않아요. 죽음을 매개로 한 갈등의 종결이나 개인의 성장은 이상일 뿐이에요. 강요해선 안 돼요. 죽음의 모습은 다양한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화해하고 작별하면 남은 사람들에게 좋지요. 그래서 거리를 두고 관찰하다가 의료진과 사회복지사가 관계 회복을 위한 중재에 나서기도 합니다. 선의의 거짓말을 할 때도 있어요.”
Q. ‘좋은 삶’ 못지않게 ‘좋은 죽음’을 고민하는 시대입니다. 필연인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극복하자는 주장도 있어요.
“’좋다’는 돌봄 제공자 입장의 표현이에요. 죽는 장소나 상황에 대해 정해진 틀을 강요하는 의미가 깔려 있죠. 죽음을 왜 평가하나요. 삭막한 중환자실에서 혼자 임종했다고 해도 자기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평가절하할 수 없어요. 환자 입장에선 좋고 나쁘고를 떠나 ‘편안한 죽음’이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는 건 어차피 불가능해요. 레토릭에 불과하죠. 중요한 건 죽음의 과정에서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정교한 시스템을 만드는 겁니다.”
<
최문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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