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이발. 금융권이 밀집한 지역이라 안전했고 서비스로 커피까지 준다. 거울 앞 큰 병에 들어있는 수십 개의 가위가 그의 경력을 말해준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이발을 하지 않고 여행지에서 이발을 한다. 관광보다 여행을 하기위해서다 대다수 남자들은 단골 이발소에서 이발하고 관광 중 이발을 한다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 지역의 특성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이발소만한 곳도 없다.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이발을 해보았지만, 동양 이발사들은 주로 손님이 대화를 이끌지 않는 한 침묵을 지키는 반면, 서구권 이발사들은 대화를 즐긴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같은 오페라는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탄생했다.
예전 경찰 근무시절에는 흑인 이발소도 자주 이용했었는데 그들의 입담과 정보력은 대단했다. 흑인 이발소는 동네방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얼마 전 Tauck 여행사와 함께 포르투갈 여행을 할 때였다. 도우로 강을 끼고 도는 뛰어난 도시 경관, 맛깔 나는 포트 와인, 과거 영광을 대변하는 수많은 성당 등 관광할 곳이 넘쳐나는 곳이다. 아침 보트 관광으로 강 주위를 둘러보고, 오후에는 Taylor’s 포트 와인 본사에 들러 와인 제조 과정과 역사를 듣고, 포도덩굴 아래에서 점심 식사를 하며 정통 음악도 감상하고 여인들의 춤도 구경했다.
소화도 시킬 겸 여행사에서 제공한 버스를 마다하고 걸어서 그 유명한 강 다리를 넘어 호텔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가이드는 언덕길이라 힘들겠지만 약 2마일 거리라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며 웃는다.
<언덕길을 걷다 발견한 이발소, 콜롬비아 이발사들>
포르투갈 보도는 모두 자갈길이라서 조심하며 걸어 올라갔다. 한참을 가니 멀리 강 다리가 떡하니 그 멋진 모습을 뽐낸다. 1886년 개통한 2층 철제 구조의 다리는, 에펠(Eiffel)의 제자가 디자인했는데 자동차, 철로, 인도 모두 수용하며 두오로 강 위에 떠 있는 위용이 대단하다.
큰 도로 옆 이발소를 지나가려는데 안에서 시끌벅적했다. 내가 아내에게 이발이나 해야겠다고 하니 그녀가 미소 지으며 이발소 안으로 들어가 넓은 소파에 덜컥 앉는다. 포르투갈어가 서툰 내가 동양 머리도 깎느냐고 스페인어로 물어보니, 젊은 이발사가 자신의 검은 머릿결을 내게 보인 후 높은 의자를 흰 천으로 털며 자신 있게 나를 앉힌다.
10여 명의 젊은 남자들이 5명의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 한쪽 구석에는 당구대도 있었다(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발할 때는 젊은 여인들이 바에서 술도 서빙해 주었다. 놀랍게도 위스키 바가 떡하니 이발소 중앙에 있었다. 멋을 말하자면 아르헨티나는 참 멋진 나라다).
둘러처져 있는 거울 위로는 젊은 콜롬비아 축구 선수들의 사진들이 이발소를 장식하고 있다. 익숙한 ‘헤미네스’ 선수의 사진도 있었지만 ‘호날두’ 같은 포르투갈 선수 사진은 없어서 어떻게 포르투갈에서 콜롬비아 축구 선수 사진들만 있고 호날두 사진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이 놀라웠다. 이발사 모두 콜롬비아 출신이란다.
<이발로 이해하는 역사와 문화>
오늘날 이발 문화는 서양 문화다. 중국, 한국, 일본 모두 19세기 이후 이발 문화를 받아들였다. 동양에서는 그 첫 주자가 1871년 단발령을 선포한 일본이었고, 자연히 우리에게는 이발에 관한 용어로 일본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가 1705년 ‘수염령’을 선포하며 (표트르 대제) 러시아 귀족과 관리들에게 수염을 깎고 서양식 머리를 하도록 강요했고, 불응한 경우 직책을 박탈했다.
청나라는 1910년 변발 폐지와 단발령을 선포했는데, 중국의 경우 헤어스타일 하나만 보아도 과거의 청나라와 신해혁명(쑨원 정부) 후의 중국을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터키) 역시 개혁의 첫걸음은 면도와 서양식 짧은 머리를 도입하면서부터다(1839). 특히 터키의 아버지로 불리는 케말 아타튀르크는 (1923) 국가 지도자로서는 처음 양복 착용과 서양식 헤어스타일로 과거와의 결별을 선포했고, 이후 터키 사회 전반에 걸쳐 서구식 이발 문화와 정치가 주변 무슬림 국가들과 차별화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면, 중동에서 항상 패권을 다투던 이란(페르시아)의 경우 팔레비 왕조의 레자 팔레비(1925) 가 서구식 개혁을 강력히 주도했다.
이란은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긴 수염과 머리를 길렀는데, 정부 공무원과 군인들에게 짧은 머리와 면도를 의무화했다. 반발도 심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그들은 다시 1925년 전으로 복귀한 모습이다. 이처럼 머리 스타일과 이발 문화는 상당히 심오한 역사적, 문화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먹고살기 힘든 남미, 이민이 힘든 미국, 차선택은 유럽>
바리캉과 가위로 머리를 다듬으면서도 이발사는 바쁜 입을 쉬지 않았다. 별반 자랑할 거라고는 축구밖에 없고 자국 경제가 너무나 안 좋아서 젊은이들은 모두 탈출한다며, 그나마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비자 받아 오기가 다른 나라들보다 수월하고 언어도 통해서 살아갈 수 있단다.
주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남자들은 서비스업에, 여성들은 가정부로 일하며 고국의 식구들에게 송금한단다. 인종과 국적은 달라도 정서는 같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이발>
깎을 머리도 별반 없는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가 옆자리에서 대화를 엿듣다 영어로 거든다 (본인이 영어 할 수 있다는 점을 과시하며 또한 대화 내용을 이발사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같았다). 그는 앙골라와 모잠비크 출신들 때문에 골칫거리라며 눈을 위로 치켜세운다. 구식민지 주민들에게 시민권과 거주증을 준 결과다.
도심에는 거리에서 불법 행상하는 아프리카 출신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유창한 영어실력을 묻자 투자은행에서 일한단다. 투자유치를 받으려면 영어는 필수일 것 같다.
이발 후 샴푸 그리고 뜨거운 타올로 목 마사지도 서비스 받으며 콜롬비아 이발사들과 농담도 나누었다. 저렴한 이발비를 계산하고 나오며 팁까지 두툼히 쥐어주자, 눈치 빠른 이발사가 금방 ‘아미고’에서 ‘시뇨르’로 신분을 상승시켜 준다.
멋진 풍광의 강 다리 위를 아내 손잡고 걷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Sweet Caroline, 밤밤바~ good times never seemed so good, 밤밤바~~”
이런 것을 두고 ‘life is good’ 이라고 표현하는가 보다. 깔끔한 이발과 스스로를 즐겁게 해주는 것도 배우자를 위한 배려이며 존중이다. 나는 현재 뉴질랜드를 여행 중이다. 이곳 이발소들 중에는 이발소에서 마사지도 겸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
제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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