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성 산불 엿새 만에 주불 진화
▶ 방염복 없이 사력 50대 의용소방원 집 전소됐는데도 “제가 나서야죠”
▶ 7시간 실종자 수색 소방대원
▶ 이재민 급식소·목욕 봉사 온정
▶ 자택 지붕 타버린 60대 등 ‘봉사의 손길’

경북 지역 산불 대응에 투입된 소방 구조대원들이 26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1리의 전소된 주택을 호미·곡괭이 등으로 수색하고 있다. [조양현 전남소방본부 119특수구조대장 제공]
"이곳 의용소방대원 19명 중 6명은 집이 전소됐어요. 저도 그 여섯 중 한 명입니다."
27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에서 만난 의용소방대원 황창희(58)씨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의용소방대는 화재나 재난상황 시 소방관들을 보조하는 일종의 '예비군'이다. 소방 호스를 연결·연장해 소방관들이 특정 지점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후방 지원한다. 올해 의용소방대에 자원한 황씨는 1주일 가까이 불길을 막느라 분주했다. 방염복도 없이 이곳저곳에서 불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화염은 그의 집까지 삼켜 버렸다. 황씨는 "불이 도깨비처럼 튀어다니면서 순식간에 넓은 지역을 훑고 지나갔다"며 몸을 떨었지만 꿋꿋한 모습이었다. "마을에 젊은 사람이 없는데 저라도 도움이 돼야 하지 않겠어요."
의성군에서 시작돼 경북 북동부 지역 5개 시·군을 휩쓴 '괴물 산불'의 주불이 발화 엿새 만인 28일 진화됐다. 이번 산불로 24명(경남 산청 산불 사망자 4명 제외)이 숨졌고, 주택 등 시설 4,646곳이 불에 탔으며 여의도 156개 면적이 소실됐다. 산불에 쫓겨 터전을 나온 이재민도 3만3,000명이 넘는다. 불길이 휩쓴 6일은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화염과 싸우며 이재민을 포용한 수많은 이들의 땀방울이 빛났던 시간이기도 했다.
소방대원들은 산불 최전선에서 온 힘을 짜냈다. 의성군 산불 대응에 투입된 영주소방서 김주철 소방관은 28일 한국일보 통화에서 "(화재가 가장 심했던) 25, 26일은 교대를 못 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이틀 꼬박 불을 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큰 불길은 잡았지만 잔불 제거를 위해 전국 소방서 소속 대원들은 야산에 투입돼 낙엽 사이사이까지 훑어내리고 있다.
불길에 산산이 무너진 집을 헤집으며 분투한 구조대원들도 있다. 조양현(60) 전남소방본부 119특수구조대장은 화마가 영덕을 덮친 이튿날인 26일, 영덕읍 석1리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이모(101)씨를 찾아나섰다. '불바다'가 됐던 현장은 처참했다. 전소돼 형체도 알 수 없이 내려앉은 집터에서, 조 대장과 대원들은 호미와 갈퀴로 하루 꼬박 재를 긁어내며 고인의 흔적을 찾았다. "장례를 치르고 싶으니 작은 시신 조각만이라도 꼭 찾아달라"던 유족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7시간 넘는 사투 끝에 겨우 찾아낸 건 작은 뼛조각 몇 개뿐이었다. 조 대장은 "황토집이 무너지면서 불로 가마처럼 달궈져 있었다. 30년 소방관 생활에서 처음 느껴보는 열기가 확 끼쳐왔다"며 "(상황상) 고인이 완전히 소사(燒死)하신 걸로 추정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소방·구급 대원의 '밥심'을 챙기러 팔을 걷어붙인 이들도 있었다. 26일 낮 12시쯤, 안동시 임동면 무료급식소에서 바삐 일하던 새마을부녀회장 최희자(69)씨는 기자를 보자마자 "식사하시겠느냐"고 권했다. 최씨는 25일 불이 급격히 번진 것을 보고 이튿날 오전 곧장 급식소를 차렸다. "주민들이 배라도 채워야 덜 슬프지 않겠느냐. 작은 보탬이라도 되려고 나와 있다"며 분주히 밥을 펐다. 이곳을 찾은 의용소방대원 이덕철(55)씨는 "지난밤 한숨도 못 자고, 집마다 찾아다니며 밤새 구조한 뒤 먹는 첫 끼"라며 급히 한술 떴다.
대피소 곳곳에선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아픔을 보듬으려는 도움의 손길도 눈에 띄었다. 28일 안동시 대피소인 안동체육관은 이재민뿐 아니라 전국에서 달려온 자원봉사자들로 붐볐다.
경국대 간호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신지영·김솔이(이상 21세)씨는 휴교한 틈에 도움의 손길을 보태러 왔다. 이들은 “우리 집도 안동과 멀지 않은 예천이라서 남 일 같지가 않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돕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체육관에 차려진 식혜·쌀국수 배급 천막에서 일하던 60대 정모씨도 “우리 집 역시 불에 지붕이 녹아내렸다”면서도 “나도 머리가 복잡하지만, 여기라도 나와서 서로 아픔을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된 대피소 생활을 돕기 위한 ‘세심한 고민’도 보였다. 영덕군 축산면 대피소인 축산면사무소에서 28일 만난 자원봉사자 서모(57)씨는 삼삼오오 모인 이재민들에게 다가가 “차를 불러 곧 목욕탕에 모시고 가겠다”고 알렸다. 서씨는 “벌써 나흘째인데 씻지를 못하니, 지금은 씻는 게 급한 것 같아서 봉사단체 회장님들과 차량을 조율 중”이라며 “가시려는 분이 많으면 다른 면에 있는 큰 목욕탕으로 어르신들을 모셔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안동체육관에서 아이들의 색칠 공부를 도와주던 유하영 안동시가족센터장은 “어제 현장을 둘러보니 이재민 중 아이들도 적지 않아 오늘 바로 센터에서 나와 부스를 차렸다”며 “아이들은 물론 적적하실 어르신들을 위한 윷놀이 도구도 마련해 놨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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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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