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는 실낙원이다. 신이 창조한 대자연은 아름답고 아담과 이브의 후예들은 현대식으로 잘 정돈된 도시를 형성했다. 짧은 역사의 오크랜드는 현대식 통유리 건물이 많고 토론토나 밴쿠버를 연상시킨다. 도시나 사람이나 정리 정돈된 모습이 좋다.
뉴질랜드는 유난히 이발소가 많은 나라다. 동네 한 바퀴 걷는데 수많은 이발소를 만났다. 나는 전통 이발소를 선호하는데 그 나름 이유가 있다. 그런 곳이 맘이 편해서다. 맑은 아침, 메리엇 호텔을 나와 더 젠트리(The Gentry)라는 이발소를 찾았다. 걸어서 5분, 부둣가 오피스 건물 2층에 자리 잡았다.
<무서운 뉴질랜드 마우이 이발사>
말끔한 이발소와 달리 마우이 원주민 남자가 높은 가죽의자에 나를 앉혔다. 그의 양팔 문신은 목덜미를 타고 귓볼까지 치솟아 있었다. 문신의 원조가 이 지역이다. 나 역시 미군과 경찰 생활 때, 문신에 대한 충동이 없지 않았다. 문신은 반항의 상징이다. 당시 공무원은 문신이 허용 되지는 않았고 진급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문신은 기피대상이다. 기득권과 반항은 양립 불가능하다.
<면도사 칼에 베다>
장비 같은 마우이 족 이발사의 손에 든 날카로운 면도칼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허공을 가르는데 무방비 상태로 누워있는 나의 심정은 편치 않았다. 한번은 젊은 면도사가 실수하여 귀 뒤편에서 피가 났었다. 손동작이 어색하고 불안했는데 역시나 따끔하더니 피가 제법 났다. 면도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피를 봐야 성장한다.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이발소에서 면도는 사라진지 오래다.
<옛 정취를 유지한 월남 이발소>
미국, 또는 한인 업소들과 달리 월남인이 운영하는 이발소는 거의 대부분 면도를 해준다. 나의 단골집 중 하나인 알링턴 23가에 있는 월남집은 면도비를 따로 안 받고 사이드번(구렛나루) 주변, 귀 뒤편과 목 주변을 셰이빙 크림을 바른 다음 면도해주고 초록색 애프트 세이버를 발라주는데 그 특이한 향과 살결을 에는 순간적 고통이 이상하게도 좋다.
여주인이 핫 타월로 얼굴과 뒷목을 마사지해주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서비스로 달큰한 월남 커피도 준다. 손님이 없는 한산한 시간대에는 한숨 자고 가라며 의자를 눕혀주고 눈에는 손 타월, 몸에는 작은 담요도 덮어준다. 그럼에도 자주 안 간다. 월남 여자 특유의 높고 갈라지는 목소리와 끝없는 수다가 귀청을 쉬지 않고 괴롭히기 때문이다. 이발사와 운전기사의 중요한 덕목중 하나는 언제 말하고 침묵을 유지하느냐다.
<시골 출신 이발사들과 재단사들>
뉴질랜드 이발소들은 마사지, 손톱, 발톱까지 한다는 사인을 큼지막하게 걸어두고 있다. 이발사에게 물어보니 남태평양 작은 섬에서 이주하여 몇 해를 시다로 일하다 얼마 전 허가증을 받았다며 자랑했다. 왜 이발소가 많은지 물어보니 소수인종, 저교육, 시골출신들이 할 수 있는 자영업중 제일 선호하는 직장이란 설명이다. 그리고 보니 내가 이용했던 한인 이발사들 중 서울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서울에 많았던 양복점 재단사들도 모두 지방 출신이었다. 가위 들고 일하는 직업들은 지방 출신들이 도맡아 했다. 호텔로 돌아오니 와이프가 늦었다며 재촉했지만 이발에 대해서는 일언 언급이 없다. 반면 와이프가 머리를 하고 온 날은 우리 집 경삿날이다.
<자신에게 정직한 이발소 사장>
지난 2월8일 한겨울 추위 속에서 조선호텔을 나와 한진빌딩 지하 이발소를 찾았다. 이발소 구조가 좀 특이하다. 흰 커튼을 친 작은 각방들이 있고 방안에는 의자와 세면대 그리고 옷장이 있는데 처음 갔을 때 요즘 볼 수 없는 그 옛 모습에 향수가 느껴졌다.
팔순 넘은 현역 사장님은 새까만 머리카락에 숱이 풍성해서 비틀스 머리를 하고 있다. 작년 백내장 수술을 했는데 이발하는데 문제가 없느냐 묻자 이발은 손으로 하는 것이라 답한다. 이발하면서도 그의 덕담은 끝이 없었다. 추위에 이발소 손님은 나 혼자, 면도와 머리 감겨주던 환갑이 넘은 아가씨 종업원 2명 모두 출근 안 했다고 묻지도 않은 답을 해주신다.
한때 4명의 이발사와 6명의 아가씨들이 일하던 이발소는 지금 그 혼자다. 40년 전 조선호텔 지하 이발소에서 3층 사우나 안으로 이사 갔다가 어느 손님의 진정으로 호텔로 부터 퇴폐영업 경고 받고 쫓겨난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먹고 살기 위해 뭐라도 했던 시절>
퇴폐영업에 대해 너무 가난했던 시절 이발만 해서는 도저히 생활이 안 되었다며 또다시 묻지도 않은 대답을 스스로 하시고 계셨다. 겨우 밥 좀 먹고 살만 하니 IMF가 터지고 또 좀 살만 해지자 코비드 사태가 발생하여 경제적 손실이 너무 커서 1년 반 동안 그동안 번 돈 다 까먹고 빚까지 지게 되었다며 오랜 세월 같이 했던 식구들 다 내보냈을 때가 가장 가슴 아팠다한다.
어려웠던 시절 무작정 상경하여 이발소에서 잔뼈가 굵고 허기를 골목길에서, 지하에서 채웠던 젊은이들. 어릴 적 동네 이발소 이야기를 하니 그는 옷장 속에서 면도칼 갈던 넓적하고 낡은 가죽 벨트를 찾아 보여 준다. 수없는 면도칼 자국들이 수놓은 고풍의 가죽벨트를 바라보니 파란만장 한 인생길을 보는 듯 했다. 그의 장발머리가 예술인 아니 신선같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단정히 이발하고 나오니 서울 고층빌딩 사이를 끼고 도는 찬바람이 매섭다. 한진빌딩 건물은 시청이 지척이라 그곳에서의 데모 함성이 들려왔다.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던 오빠 언니들은 침묵의 다수로 있건만… 명동 사보이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따뜻한 고추짬뽕에 소주 한잔이 필요했다.
<세상 이발소를 찾아 해매는 이유>
이발을 할 때면 어린 시절 아버님과 같이 고급 이발소에 갔던 추억이 살아난다. 어머니는 내손에 딱 이발비만 쥐어주고는 동네 이발소에 나를 보냈다. 그런 이발소는 벽돌같이 우악스러운 비누로 머리를 감기고 머리는 항상 바리캉으로 밀었다.
반면 아버님과 같이 갔던 이발소는 섬세한 가위로 사각 사각 이발하고 머리를 부드럽고 흰 비누에 감아주고 눕혀서 귀 청소에 손톱 깎아주고 따뜻한 타월에 이발 후 흰 파우더도 뿌려주었다. 좋은 향이 없던 시절 흰 파우더는 향수와 같았다. 조용히 고개 숙여 손톱 손질해주던 한참 연상의 여인, 풀 먹여 다림질한 흰 가운의 촉감 그리고 옆 좌석에서 눈을 감으신 채 면도 받으시던 아버님의 표정이 오버랩 될 때면 그 시절이 절실히 그리워진다.
아버님은 사업 하신다고 미국으로 혼자 떠났고 다시 미국에서 재회했을 때 이미 난 사춘기 반항아로 돌변해 있었다. 그 후 단 한 번도 아버님과 같이 이발을 같이 한 기억이 없다. 그분은 너무 일찍 세상을 등지셨고 나는 불효자로 남았다. 아마도 나는 그 추억을 되찾고자 세상의 모든 이발소를 전전하는지도 모른다.
<제프 안: 미한연구원 원장>
Jahn20@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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