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대전 사진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의 하나는 히틀러가 파리 앵발리드에 놓여 있는 나폴레옹 관을 쳐다보는 장면일 것이다. 1940년 6월 파리에 입성한 히틀러는 이곳을 찾아 “지금이야말로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란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한 히틀러는 한 달여만에 폴란드 군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1940년 6월 프랑스를 공격해 불과 2주만에 파리를 점령했다. 그리고 제1차 대전에서 지고 독일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던 바로 그 콩피엔느 숲에서 프랑스의 항복을 받았다.
역사가들은 바로 이 순간 누가 히틀러를 암살했더라면 그는 독일 역사상 최대의 영웅으로 남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베르사이유 조약의 치욕을 깨끗이 씻고 독일을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었으며 아직은 유대인 대학살이란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된 성공은 그의 눈을 멀게 한다. 영국 침공이 어려워지자 그는 동쪽으로 기수를 돌려 1941년 6월 소련을 침략한다. 한때 잘 나가는 것 같던 전투는 소련의 광대한 영토와 자원, 그리고 혹심한 추위로 갈수록 수렁에 빠지면서 독일 몰락의 원인이 된다. 나폴레옹의 관을 쳐다보며 자기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했겠지만 결국 똑같은 길을 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놀랄만큼 닮아 있다. 둘 다 변두리 출신으로 자력으로 절대 권력의 정상에 올랐고 전쟁의 도움을 받았으며 자신의 힘을 과신하다 무너졌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본토가 아니라 원래 이탈리아 제노바의 일부였다 프랑스로 넘어간 코르시카 출신으로 귀족 자제들에게 멸시당했다. 그런 그가 두각을 나타내게 해 준 것은 프랑스 혁명이다. 1793년 프랑스 남부 툴롱이 반혁명군의 손에 떨어지자 24살의 나이로 포병 지휘관으로 임명된 나폴레옹은 순식간에 이를 탈환함으로써 능력을 인정받는다.
그 후 전투마다 이기며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1799년 서른에 ‘무월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며 5년 뒤인 1804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승리한 그는 베를린의 프레데릭 대왕의 묘를 찾아가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우리는 여기 올 수 없었을 것”이란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 나폴레옹도 영국 침략에 실패하고 러시아에 덤벼들었다 참패한 후 엘바로 유배됐다 돌아오지만 1815년 워털루에서 패한 후 대서양의 고도 세인트 헬레나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비인 미대에 두번 낙방한 후 거리에서 수채화를 팔며 노숙자 생활을 하던 히틀러를 구해준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었다. 이 전쟁에 사병으로 참전해 용맹을 인정받아 철십자 훈장을 받은 그는 전쟁 패배의 원인이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이 등에 칼을 꽂았기 때문이란 음모론에 빠져 정치판에 뛰어들며 나치당의 지도자가 된다.
1923년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를 유명하게 만들며 선거를 통해 1933년 합법적으로 독일의 지도자가 된다. 그 후 ‘수권법’을 통과시켜 절대 권력자가 되며 제2차 대전을 일으키고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다 아는 바다.
올해는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한지 210주년이 되고 30일은 히틀러가 베를린 벙커에서 자살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30일은 또 월남이 망한지 5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월남이 망하는 날 살아보겠다고 사이공의 마지막 미군 헬기에 몰려드는 월남인들 사진 또한 인상적이다.
월남전은 미군이 패한 최초의 전쟁이기도 하다. 10여년 동안 최대 50만을 투입해 5만8천명이 죽고 30여만명이 부상당하고도 이런 결과를 낳았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자신의 힘에 대한 오만과 베트남인들에 대한 경시일 것이다.
이는 그전 베트남의 주인이던 프랑스인들의 생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기도 하다. 제2차 대전 중 독일에게 져 힘을 쓰지 못하는 동안 일본에게 넘어갔던 베트남은 1945년 일본이 쫓겨나면서 독립할 것처럼 보였지만 프랑스는 돌아와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를 뒤엎고 다시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인들은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한 끈질긴 투쟁을 시작했으며 그것은 1954년 5월 디엔 비엔 푸 전투가 프랑스의 참패로 끝나며 마무리되는 듯 했다. 8만명의 베트남군이 1만4천명의 프랑스군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낸 이 전투는 식민지인들도 유럽 강대국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보았더라면 미국은 월남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다 쫓겨나는 망신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도 국가도 성공이 계속되면 오만해지기 마련이며 그 오만 속에 패배의 씨는 자란다. 스스로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있다면 30일의 교훈을 되새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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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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