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진리가 있다. 바로 '단순할수록 어렵다'는 것이다. 얼핏 쉬워 보이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단순함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흔히 먹는 아이스크림이나 젤라토도 다르지 않다. 단순히 컵 안에 든 달콤하게 얼린 유제품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디테일은 또 하나의 세계라고 할 만큼 장대하다.
더위가 본격적으로 고개를 내미는 요즘 '가스트로노믹 젤라토(재료 자체의 짠 맛과 감칠맛 등을 표현한 젤라토)'를 선보이는 '젠제로'의 권정혜(45) 셰프를 만났다. 권 셰프는 2017년 한국 '젤라토씬'에 혜성처럼 등장해 옥돔, 양파, 감태, 굴, 제피 등 시원하고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다양한 한국의 식재료를 젤라토로 풀어내는 것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가끔 이벤트성으로 선보이는 독특한 재료의 젤라토 외에도 초당 옥수수, 쌀, 구운 피스타치오 등 익숙한 맛의 젤라토도 본고장인 이탈리아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단숨에 다섯 가지 맛의 젤라토 컵을 비우고 나니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들었다. 묘하게도 차가운 젤라토에서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 젤라토, 식품 공학의 결정체권 셰프는 2015년까지만 해도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전시 기획을 하던 회사원이었지만 30대 중반 갑작스럽게 퇴사를 결심했다. "먹는 것이 취미인 저희 부부가 나이가 들면 뭔가 사업을 시작하기가 너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한번 해보자 생각했죠."
많은 아이템 중 왜 하필 젤라토였을까. "공부를 하다 보니 젤라토가 식품 공학의 결정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젤라토는 모든 음식 중에서 거의 가장 낮은 온도로 표현되는 음식인데, 얼음보다도 더 낮은 온도에서 향과 맛이 온전히 난다는 점이 끌렸죠." 공학도인 남편과 함께 기술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는 데 매력을 느꼈고 평소 관심 있던 식재료들을 접목시켜 표현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젤라토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부부는 이탈리아로 날아가 젤라토 단기 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에 돌아와 배운 것을 토대로 젤라토를 만들었지만 금세 난관을 마주했다. "교과서적인 이론만으로는 잘되지 않더라고요. 재료도 다르고, 상업적으로 정말 맛있는 젤라토를 만들기는 어려웠죠." 우연한 기회에 이탈리아의 유명 젤라토 장인인 자코모 스키아본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젤라토는 결국 장치 산업이더라고요. 좋은 기계와 정확한 컨트롤, 그것이 맛을 만든다는 것을 배웠죠."
■ 젤라토 "디저트 아닌 음식"권 셰프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가스트로노믹 젤라토였다. "보통은 젤라토를 단순히 디저트로 생각하잖아요. 이탈리아에서 많은 젤라토들을 경험하고 나니 이것은 결국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디저트라는 한 장르 속에 국한시켜서 볼 필요가 없다고 깨달았어요." 남편과 많은 연구를 통해 해산물, 향신료, 채소 등 흔히 아이스크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재료들을 사용해 맛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를 확장했다. 다른 곳에서 먹어볼 수 없는 독특한 재료로 젤라토를 만드는 곳으로 많은 이들에게 젠제로를 각인시켰다.
젤라토와 아이스크림은 유제품을 사용한다는 면에선 같지만 만드는 과정에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온도예요. 젤라토는 아이스크림보다 높은 온도에서 만들어지거든요. 보관도 아이스크림은 영하 25도라 딱딱해서 팔이 아프게 떠야 하죠. 젤라토는 영하 12도에 보관해 처음부터 이미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해요. 그래야 입에 들어갔을 때 너무 차갑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맛과 향이 싹 퍼지며 스며들죠." 온도뿐만 아니라 질감, 풍미 모든 면에서 젤라토는 아이스크림과 다르다.
젤라토와 함께 짝을 이루는 소르베는 유제품을 넣지 않고 만든다. 소르베를 잘 만드는 게 더 어렵다고 권 셰프는 이야기한다. "소르베는 기교를 부릴 수가 없는 장르예요. 젤라토는 제가 맛을 창조할 수 있지만 소르베는 원물을 모사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해요. 좋은 소르베는 원물 과일의 맛이 투명하게 나는 소르베죠." 이런 접근법은 이탈리아의 1980년대 슬로푸드 운동과 맥을 같이한다. 더 신선한 제철 재료, 로컬 재료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그 재료의 맛이 풍부하게 나는 음식이 좋은 음식이라는 철학이다.
"초당 옥수수 같은 경우에 똑같은 농장에서 시킨 것도 배송이 늦어지면 당도 차이가 나요. 그래서 옥수수 시즌이 되면 스케줄을 다 비워놓고 주방 직원들이 총동원돼 100㎏씩 당일 작업으로 처리해요." 추어탕 등에 쓰이는 향이 강한 채소 방아로 만든 젤라토도 마찬가지다. "방아에서 잎과 줄기를 하나하나 분리해서 일부는 갈고 일부는 우려요. 거기서 어떤 비율로 할 것인지, 어느 정도 우릴 것인지, 찬 것에서 우릴 것인지 뜨겁게 우릴 것인지 g과 mL 단위로 연구하고 수정하죠."
■ 페이스트 아닌 원물 사용한 젤라토구운 피스타치오 젤라토는 젠제로의 원칙을 보여주는 메뉴다. 대부분 가격과 효율을 위해 기성 페이스트 제품을 사용하지만 젠제로에서는 원물을 그대로 사용한다. 피스타치오를 직접 볶고 맷돌 같은 기계에서 거의 액체가 될 정도로 갈아 콘칭(반죽을 오랜 시간 저어 매끈하게 만드는 과정)한 후 사용한다. 그 정성과 노력이 최종 결과물의 디테일에 영향을 준다고 그는 말한다.
올해로 9년 차를 맞는 젠제로는 늘 창의적인 메뉴 개발로 화제가 됐지만 최근에는 운영 방향을 바꿨다. 새로운 실험보다는 완성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저희 제일 상단에 있는 메뉴가 버터 캐러멜과 체리 쥬빌레예요. 일반적이고 기존에 있던 맛이지만 그것들을 굉장히 맛있게 만들고 싶어요." 그렇다고 새 메뉴 구상을 완전히 접은 건 아니다. "언젠가 발효와 관련된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어떤 재료를 발효한 후에 사용했을 때 훨씬 풍미가 나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산미와 감칠맛이 더해진 오묘한 맛을 젤라토로 표현해보고 싶죠."
젠제로의 젤라토 한 컵은 재료에 대한 고민과, 온도와 질감에 대한 세심한 조절을 거쳐 완성된 하나의 작품이다. 7,000~8,000원에 달하는 한 컵의 가격이 결코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그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아이스크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모두가 다 저희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상엔 그런 아이스크림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이스크림은 결국 행복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고 누구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잖아요. 그 가격에 너무나 잘 만들어진 식품 공학의 승리라고 생각해요."
젠제로에서 나오며 왜 젤라토에서 따뜻함을 느꼈는지를 깨달았다. 젠제로는 생강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생강의 열기와 젤라토의 차가움. 언뜻 상반된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신념과 열정이 담겨 있다. 영하 12도의 차가운 쇼케이스 안에서도 식지 않는 장인의 마음, 그것이 바로 젠제로라는 이름에 담긴 진짜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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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우 어라우즈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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