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역으로 데뷔해 69년간 170여편 출연… ‘한국 대표 배우’ 우뚝
▶ 배창호·임권택·이명세 등과 다작… “모든 감독의 페르소나”
▶ 스크린쿼터 축소 등 위기마다 선봉… “연기·지성·인품 겸비한 스타”

배우 안성기 [연합뉴스]
5일(한국시간) 별세한 안성기는 '천의 얼굴'로 70년 가까이 관객을 울리고 웃긴 국민 배우였다.
소매치기 소년부터 비리 경찰, 빈민촌의 서민, 조직폭력배 보스, 한물간 가수의 매니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우리나라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안성기는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 아역 배우로 발탁돼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60년대까지 '하녀'(1960)와 '얄개전'(1965) 등 70여편의 영화에서 아역 배우로 활약한 그는 잠시 영화계를 떠났다가 군 제대 후인 1977년 김기 감독의 '병사와 아가씨들'을 통해 성인 배우로 돌아왔다.
아역 스타는 성인 배우로 성공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던 때였지만, 안성기는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 '문제작'으로 꼽히는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이 같은 우려를 불식시켰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안개마을'·'꼬방동네 사람들'(1982), '고래사냥'·'그해겨울은 따뜻했네'(1984), '깊고 푸른 밤'(1985), '성공시대'·'칠수와만수'(1988) 등으로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가 임권택, 배창호, 이장호, 이두용 등 당대 거장들의 선택을 받은 이유로는 폭넓은 캐릭터 소화 능력과 뛰어난 연기가 꼽힌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날'(1980)에선 시골에서 상경해 변두리에 사는 순박한 청년 역으로 대종상영화제 신인상을 받았다. 차기작인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에선 수행의 길을 걷는 승려 역을 소화해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연기상을 차지했다.
배창호 감독의 '철인들'(1982)에선 산업일꾼으로 분해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배 감독의 '고래사냥'에선 노숙인 역을 맡아 다시 한번 연기 변신을 꾀했다.
안성기는 코믹 연기에도 일가견이 있어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1988)·'남자는 괴로워'(1995),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1993) 등으로 큰 웃음을 안겼다. 특히 '투캅스'는 안성기와 박중훈의 버디 연기로 호평받았고, 두 배우는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 시기 안성기는 우리 사회와 역사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 예술영화에도 자주 등장했다.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에서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으로 활약한 남자를, '하얀전쟁'(1992)에선 베트남전 참전의 기억으로 고통받는 소설가를 연기했다.
1999년에는 대표작 중 하나인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것 없다'에 살인범 역으로 출연했다. 형사 역을 맡은 박중훈과 빗속에서 벌인 액션 신은 지금까지도 한국 영화사에서 명장면으로 꼽힌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1990년대까지 영화계를 주름잡은 배우들이 변화한 촬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안성기는 예외였다.
대부분의 배우라면 전성기가 훨씬 지났을 나이인 51세에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에서 원칙주의자 군인 역을 맡아 '천만 배우'로 거듭났다. '실미도'는 한국 최초로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로 "날 쏘고 가라"는 안성기의 대사는 여러 방송에서 인용돼 유행어가 됐다.
2006년에는 '콤비' 박중훈과 재회한 '라디오스타'로 많은 관객에게 감동을 안겼다.
한때 스타였다가 퇴물이 된 가수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매니저를 연기한 안성기는 청룡영화상에서 박중훈과 함께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안았고, 대종상영화제에서는 단독으로 같은 상을 받았다.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2011)에선 부당해고와 사법부의 불합리에 맞서 치열한 법정 다툼을 벌이는 교수 역으로 녹슬지 않는 연기력을 뽐냈다. 이 작품에서도 "이건 재판이 아니라 개판" 같은 명대사를 남겼다.
이후 안성기는 임권택 감독과 재회한 '화장'(2014)을 비롯해 '사냥'(2015), '사자'(2018), '한산: 용의 출현'(2022) 등에서 시한부 아내를 둔 남자, 사냥꾼, 구마 사제, 장군 등 다채로운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선보인 작품은 김한민 감독의 '노량: 죽음의 바다'(2023)다. 그는 혈액암 투병 중에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찬일 평론가는 "한국 영화사를 빛낸 명장, 거장들의 작품에 이렇게 지속해서 출연한 배우는 안성기 외에는 거의 없다"며 "비교 대상이 없을 만큼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 배우였다"고 돌아봤다.
이어 "태도와 겸손함까지 갖춘 사람이었다"며 "배우를 넘어 인간으로서도 위대했다"고 강조했다.
안성기는 데뷔 후 TV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없었지만, 수십년간 관객과 호흡하며 친근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구축했다. 가정적이고 다정한 면모로 이른바 '안티 팬'이 없는 몇 안 되는 배우로 손꼽혔다.
덕분에 동서식품 커피 '맥심' 광고 모델로 38년간 활약했으며 한국광고주협회(KAA)의 '광고주가 뽑은 좋은 모델상'을 1995년과 2018년 두 차례 받았다.
2013년에는 대중문화예술 분야 최고 영예인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고, 202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안성기는 한국 영화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선봉에서 후배들을 이끌었던 든든한 '큰형님'이기도 했다.
2000년부터 스크린쿼터(영화관에서 한국 영화를 일정 비율 이상 상영하도록 한 제도) 수호천사단 단장을 맡고, 2006년에는 스크린쿼터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은 게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 DMZ다큐영화제 조직위원,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영화계에 이바지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안성기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그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체화한 연기로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스타"라며 "그와 일했던 모든 감독들의 페르소나였다"고 했다.
이어 "오랜 세월 동안 뛰어난 연기뿐 아니라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이상적인 스타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유했다"고 평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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