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우리는 많은 일들을 겪게 되는데 하늘에 오를 듯 기뻤던 순간이나 세상이 떠내려가듯 막막했던 경우를 당하면서 상황 따라 채색된 삶의 무늬를 갖고 있다. 그것들은 더러 걸맞지 않는 돌출 부위와 거슬리는 색상으로 인해 조화가 어긋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소중한 역사의 기록인데도 앞으로 달리는 강한 지향성 탓에 많은 부분의 과거가 퇴색하며 잊혀진다.
나는 그러한 망각현상을 일상의 군더더기 제거에 적용시켜 보며 편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최근에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정서적 혼란에 빠진 일이 있다.
중보기도 팀에 합류하기 위해 평소보다 두 시간 앞당겨 교회 출석을 하게 된 주일 아침, 주차장에 내려간 나는 차가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 있음에 놀랐다. 이른 시간이어서 빈자리 없이 들어선 다른 차들을 보며 혹시 자리바꿈 되지 않았나 하는 어리석은 추리로 살폈으나 허사였다. 차 열쇠도 없이 두 곳의 철문을 열고 흔적 없이 사라진 덩치 큰 차의 묘연한 증발에 당황했다. 며칠전 어떤 분의 차가 유리창이 깨지고 라디오 등이 분실되는 사고가 생겨 입주자들의 리모트 컨트럴(Remote Control) 번호를 모두 바꾼 일이 있었는데 연거푸 차체가 통째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현실인 것이다.
다음날 동생과 함께 경찰서와 DMV를 부지런히 다니며 도난신고와 기타 필요한 증명서 재발급 신청을 했다. 주변에서는 "오래된 차니 바꿀 때도 됐다" "이제 작은 차를 구입하라" "더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다"라는 등, 위로와 체념을 돕는 여러 말들을 했지만 텅빈 차자리의 썰렁함을 둘러보면서 만신창이 되어 돌아온 차를 맞게 될지도 모를 황당한 경우까지 생각하며 한심한 걱정을 했다.
수요 성경공부와 예약된 병원 가기, 그리고 소셜 오피스(Social Office)와 은행 용무 등 정해진 일정을 버스와 도보로 마치고 피곤에 지쳐 돌아오던 날 차를 찾았다는 전갈을 받았다.
일주일에 이틀씩 저녁에 들리는 가까운 빌딩의 주차장에서 낯익은 모습의 차를 본 순간 나는 반가움과 동시에 정신이 멍-해졌다. 금요일 밤부터 세워져 있는 차를 관리사무실에서는 토잉하라 했지만 뒷좌석에 있는 책과 신문을 보고 한국인의 차 같아서 한국사람인 경비 책임자의 배려로 엿새 동안 보류했다는 것이다. 엉뚱한 주차료를 지불하긴 했지만 견인된 곳까지 가서 차를 찾아와야 되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게 해준 그 분께 감사했다.
낮동안의 급한 볼일외에는 밤운전을 하지 않던 나였고 더욱이 십분의 도보거리인 그 곳은 쉽게 걸어다녔으므로 거기에 차를 두고 왔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다. 내가 집에 있으니 차도 당연히 집 차고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차가 거기 있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차의 부재를 발견하기 사흘 전의 행보가, 끊어진 필름처럼 묻혀진 채 전혀 유추되지 않는 내 기억의 회로가 의심스러웠다. (이게 바로 치매의 전조인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잊어버리는 상황이 오는 건 아닐까) 문득 오래 전에 본 영화 ‘마음의 행로’기 떠오르며 곤혹스러워졌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기억 상실로 빚은 자동차 분실사건은 내게 하나의 충격이었으며, 모든 입주자에게 또 한번 리모트 컨트럴 손질의 번거로움과 걱정까지 끼친 것도 송구스럽다.
"이제 신상 기록한 목걸이를 달고 다녀야 할까봐요"
나는 매니저 미세스 허에게 미안함과 더불어 인사를 하였더니 "글쎄 노인네들 돌봐드리다 보니 나까지 헷갈린다니까요"하며 더러 있었던 입주자의 건망증 후일담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아무튼 반갑지 않은 이번 경험으로 새삼스레 지난날과 오늘이 담긴 내 삶의 화폭을 점검하는 기회를 차분히 가지면서 준비된 자세로 때를 기다려야 하리라는 마음의 일깨움을 얻게 되었다.
그간의 난처했던 경위를 들으며 내 긴장을 의식한 이웃이 고개를 젓는다.
"아직 그럴 때는 아닌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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