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황찬란한 라스베가스의 밤이었다. 한 동양남자가 ‘룰렛’이라는 도박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삼십 중반쯤 돼 보이는 그는 한국남자임이 분명했다. 나는 슬럿머신을 기웃거리다 우연히도 이 남자에게 눈길이 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테이블 대각선에 서서 그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도박에 문외한인 나는 얼마짜리 칩이 있으며 또 어떻게 베팅을 하는지조차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베팅하는 액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구경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으로 눈치챌 수 있었고, 그 남자 앞에 쌓여 있는 칩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천달러짜리 칩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남자는 룰렛판에 반 이상을 칩으로 채우고 있었지만 결과는 번번이 딜러가 싹싹 쓸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금 후 매니저가 나타나 둘이 서로 반갑게 껴안는 것으로 봐 그는 분명히 큰 단골인 것 같았다. 그가 종이에 사인을 하니 딜러는 거액의 칩을 그 앞에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 많던 칩도 얼마 안 가서 없어지고 말았다. 어느새 나는 그의 편이 되어 가슴을 두근거리며 굴러가는 주사위를 좇고 있었다.
냉수를 들이키는 남자의 손가락에 낀 결혼반지가 슬프게 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덩달아 들고 있던 물을 마셨다. 계속 잃기만 하더니 마침내 주사위가 맞아 떨어져 칩이 다시 그 앞에 수북히 쌓였다. 주위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나는 그만 하라는 눈짓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다시 칩을 놓았고 주사위는 번번이 빗나갔다.
나는 그를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며 온갖 상상을 다해 보았다. 결혼반지를 끼었으니 아내가 있을 것이고 나이가 그만하니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가족들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그는 이렇게 많은 돈을 물 쓰듯 해도 되는 것일까.
며칠 전 신문에 난 기사가 생각났다. 서울에서 경마에 빠져 전 재산을 날린 뒤 이혼을 당하고 방황하는 전 회사원, 개인택시 운전을 하다가 도박에 손을 대 택시와 면허증까지 날리고 막노동을 하는 기사, 그들은 주말이면 도박장 주변을 배회하며 여전히 ‘대박의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박은 대부분이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시작했다가 한번 큰돈을 따게 되면 이를 평생 못 잊어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요즘 한국에는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카지노가 개장돼 북새통을 이루고 있고, 또 세워질 예정이라 한다. 세 사람만 모여도 화투판을 벌이는 투기성이 강한 국민성에, 정부에서 도박산업을 한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시민단체들은 지적했다고 한다.
얼마 전 이곳 방송에서 들은 얘기다. LA 근교 가디나시에 있는 카지노에 친구 따라 처음 간 사람이 장난삼아 해본 도박에 그만 ‘대박’이 터졌다. 그 날의 꿈에 사로잡힌 그는 아내 몰래 귀신에 홀린 듯 한밤중에 카지노로 향한다는 것이다. 남편을 구해 달라는 아내의 소리였다.
몇 년만에 가본 라스베가스는 거대한 호텔들이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건물 가운데 에펠탑이 우뚝 솟은 파리스 호텔, 음악에 맞춰 멋진 춤을 추는 분수 사이로 보이는 벨라지오 호텔.
눈부신 네온에 비친 행인들의 모습도 무엇엔가 취해 흔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라스베가스는 지난 1990년부터 10년 사이에 인구가 62% 증가했다. 이렇게 도박의 대도시로 무한정 발전하고 있는 이곳을 보며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일행인 친구는 몇 년 전에 슬럿머신에서 1만달러를 땄다. 그 후 어쩐지 잭팟이 터질 것만 같은 예감에 몇 번을 더 갔다가 끝내 그 이상을 잃고 자중했다고 한다.
과연 몇 사람이나 횡재를 마지막으로 도박에서 손을 끊을 수 있을까?
아무리 물질만능 시대라지만 우리의 가치관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하는 가를 생각해 볼 때이기도 하다. 물질은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지만 꼭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최선을 다하며 작은 것에 행복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우리의 삶은 좀더 나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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