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던 미당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도 두어달이 되어 온다.
어느 날 신문에서 서정주 선생의 부음을 보고 며칠을 마음이 심란했었다. 평생 그림자도 뵌 적이 없지만 아마도 나를 키운 삼할쯤은 될 내 모국어의 아름다운 시어의 백미를 장식하던 어른이므로 그랬을 터였다. 온 생애를 시를 쓰며 살다 가신 시인의 삶의 궤적이 여기 저기 신문과 잡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떻게 살 때 후회 없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새삼스러운 생각에 빠져들게 되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사랑으로 산다고, 사랑의 추억 하나만으로도 사막을 건널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다시 결론지으며, 그런 평범하고도 큰 진리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스스로를 기특해했다. 왜냐하면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을 머리로 분석하거나 이성적으로 따져서 하기를 좋아하는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험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언가와 또는 누군가와 진지하게 사랑을 나누며 살았을 때는 늘 마음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밤이 깊도록 책을 읽다가 창 밖으로 소리 없이 쌓이는 눈발을 바라보고 서 있었던 어느 겨울밤이나, 전화벨 소리조차 다른 사람의 것과 다르게 구분할 수 있던 연애시절, 최루탄 냄새에 눈물과 콧물 헛구역질까지 해대며 뛰어다니다가 펄썩 주저앉아 같이 울던 친구들이며, 그리고 첫아이를 낳았을 때와 하느님을 만났을 때. 사랑 속에 있던 자신을 생각하면 눈이 부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산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어서 등에 진 짐은 줄어들 줄을 모르고 발걸음은 해가 갈수록 왜 이리 무거운 지, 건조한 이 곳 날씨만큼이나 마음에는 푸석푸석 흙먼지만 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 점점 웬만한 일에는 감동도 사랑도 느끼지를 못하면서도 가족에게로만, 특히 아이들에게로만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는 것을 느낄 때는 잠시 숨을 돌리고 나와 자식들을 너무 동일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누구에게나 유년의 기억은 평생을 가고 부모의 사랑, 특히나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은 삶에 자양분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 우리의 아이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배움의 기회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일률적인 경험만을 하고 크고 있는가 하는 것은 나만의 걱정이 아닐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주기보다 절제하기가 더욱 힘들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집집마다 꼭 필요하지도 않는 아이들 선물이 쌓이고, 그 선물도 며칠 지나면 아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경우를 볼 때마다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에 울적해지곤 한다.
우리들의 비뚤어진 사랑이 단지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돌아갔던 길들을 아이들은 똑바로 가기를 바라고, 작은 실패의 경험도 용납하지 않으며, 시간 낭비, 감정 낭비 없이 그 나이에 해야할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해내기를 바라고 강요하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돌아갔던 길, 내가 때때로 게으름도 피우고 곁눈질도 했던 그 길에서 배우고 깨달은 것이 훨씬 많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젊었을 때는 천재적인 것, 반짝이는 능력과 감성등에 마음이 갔는데 이제는 따뜻한 것,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사랑하는 능력이야말로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어차피 엄마라고 이름 붙여진 사람들이 제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대상은 아이들일 것이다. 그 사랑을 좀더 사랑답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라도 자식을 조금 떨어뜨려 놓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하는 사랑의 새로운 공식으로 자리 잡기를 소망해 본다.
그렇게 키운 우리의 아이들이 한국인만의 것도 미국인만의 것도 아닌 국제인의 면모로, 하느님과 가족, 그리고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다음 세대를 이어 주기를 바란다면 내 꿈이 너무 야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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