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사는 이야기
▶ 백재욱 <리맥스100부동산 대표>
부동산업을 시작한지 몇 달도 안됐을 때의 일이다. 손님이 원하는 집을 찾느라고 매물정보책자를 눈이 빠지게 들이파고 있다보니, 너무도 완벽한 조건의 물건 하나가 탁 들어왔다. 집 보일 약속을 하기위해 담당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거는데 어찌나 흥분을 했던지 손가락이 달달 떨릴 정도였다.
"헬로우"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상대방을 불렀는데 아무 소리가 안 들린다. 다시 한번 "헬로우"하자 몇초가 지나더니 건너편에서 목이 꽉 잠긴 목소리로 헬로우를 한다. 마치 진흙탕속에 빠진 장화발을 꺼내듯 힘이 들어하는 목소리다. 나는 따발총을 쏘듯 읊어댔다. 무슨 회사의 아무갠데 그 집을 언제 보여줄 수 있겠는지...
갑자기 진흙속에서 장화가 쑥 빠져나오듯 상대방 목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what?" 아까의 Hello를 그대로 표기하자면 ‘크흐애앨러’였는데 이번은 쌍기역이 한 10개쯤 될 정도의 "꽛?"이라고나 할까. 억지로 빠진 장화가 그 반동에 마치 콧잔등에라도 부딪치듯 퍽 소리가 날 정도였다. 나는 무의식중에 얼얼한 코를 감싸며 다시 설명을 하는데, 저쪽에서는 장화에 묻은 진흙덩어리를 털기라도 하듯 잠시 푸르륵거리더니, 기운이 빠져 털썩 주저앉듯한 목소리로 "얘, 너 시계있니? 밤에는 젖소조차도 자는 법이야"한다. 놀라서 벽시계를 쳐다보니 새벽 세시이십분.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그렇지, 그 시간엔 밤도둑이라도 자야겠지.
흔히들 "젖소는 24시간 젖을 짠다"고 한다. 젖소라고 하니까 어째 가슴 큰 여배우가 나왔던 영화제목이 얼핏 떠올르지만, 어쨌든 진짜 젖소는 일정한 시간에 젖을 짜기는 하되, 평소에 먹는 것도 운동하는 것도 모두 우유를 듬뿍 고이게할 목적에 맞춰 24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나온 말이란다.
연애에 빠진 사람들이 앉으나 서나 꿈에서나 생시에나 애인 생각하듯이, 에이전트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휴가를 가서도 부동산 간판을 보면 달리던 차를 천천히 몰며 무심결에 전화번호를 읽는다. 그래서 같은 업계의 동료들끼리 얘길하다보면 일상사에도 부동산 용어가 툭툭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누가 데이트를 시작했다고 한껏 무드 잡고 고백을 하면, 그걸 들어주는 에이전트는 "그래, 말들어보니까 그 사람 핫 프라퍼티같다. 어물어물 하지말고 빨리 에스크로부터 열어. 인스펙션은 했니? 그런 사람이 왜 여태 혼자 있었을까? 등기랑 퍼밋같은건 다 확실하지? 복수 오퍼 몰리기 전에 어서 손 써라. 일단 에스크로를 열고 디스클로저(셀러가 자신의 집에 대해 알고있는 모든 하자를 밝히는 서류) 받으면서 내부검사, 지질검사 모두 다 해봐. 어프레이절(융자해줄 은행에서 부동산 가치를 감정해주는 것; 이 경우에는 부모나 친지의 평가쯤 되겠다)도 중요하지만, 본인이 제일 중요하지 뭐. 네가 정 좋으면 풀 캐시(Full cash)로 사" 하는 식이다.
그런가하면 권태기에 빠진 기혼자들은 일부일처제를 통탄하고, 백년해로의 미덕을 불평하면서, 왜 더블 에스크로(매매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또 양도계약을 맺는 것)가 꼭 쌍방의 승낙을 받아야 하는지, 결혼도 상가건물 임대계약처럼 5년 리스에 5년 옵션 식으로 살아보고 마음에 들면 그때그때 더 연장하는 식으로 하는게 합리적이라는 등의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꿈속에서 자기 손님이 원하는 집을 발견해 미리 이방 저방 둘러보다가 그만 잠을 깨버렸는데 주소를 안 봐둔 채 깼다고 아쉬워하는가 하면, 어제 오퍼를 넣었는데 새벽꿈에 대통령이 백악관을 팔아달라고 악수를 청하면서 손에 열쇠를 쥐어주었으니 오늘은 그 오퍼가 수락됐다는 연락을 받을꺼라고 기대에 부푼 해몽을 하는 광경도 흔히 본다.
집에서 저녁식사 준비를 하든, 미장원에 가서 손톱을 다듬든, 욕조에 몸을 다듬고 있든, 부동산 에이전트의 머릿속엔 항상 부동산 생각 뿐이다. 젖소가 24시간 젖을 짜듯이.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