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간 꿈을 꾼 뜻 마음이 설레였었다. 파킹랏에서, 또 복도에서 우연히 그애만 마주치면 가슴이 쿵 떨어지고, 멍하니 운전을 하다보면 어느새 그 아이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스러웠다. 주일에 성당에서는 둘레둘레 그 아이를 찾게 되었고, 어쩌다 나에게까지 forwarding된 그 아이의 이메일을 받고는 마음이 떨리기까지 했었다. 어렸을 적, 풋풋한 열 몇살적 이야기가 아니고, 지난 겨울부터 최근까지 겪은 이야기이다.
무엇이나 조잘거리며 나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7학년짜리 딸아이가 드디어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생겼다고 말했을 때부터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요즈음 아이들은 정말 빨라서 2학년이 되자 친구중 누가 제일 인기있다는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4학년이 되니 초경을 하는 아이들이 몇명씩 생기고, 6학년때는 서로 좋아하는 아이들이 어찌나 수시로 변하는지 딸아이 이야기를 들으려면 화살표가 어디서 어떻게 가는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들어야 했다. 그런데 정작 다른 친구들 상담은 독판해주는 우리 딸아이는 한번도 좋다는 아이가 없으니, 은근히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하던 차였다. 초등학교 시절 3년간 딸아이에게 발렌타인스 데이에는 꼭 선물을 하던 일본계 아이가 있었다. 아들의 감정을 존중하여 오밀조밀한 선물들을 그토록 정성스럽게 포장을 해서 보내는 그 엄마가 참 멋져 보였는데, 정작 그렇게 받은 선물들은 하루를 못 지나고 동생에게 주어버리는 딸아이였다.
그러던 딸애가 진지하게 비밀이라며 좋아하게 된 아이의 얘기를 할 때, 얼굴에 은근히 홍조까지 띠고 있었으니 나까지 덩달아 비밀 하나가 생긴 것 같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처음에는 사춘기가 되면 친구같이 무엇이든지 얘기할 수 있는 엄마가 되겠다고 별러온 것을 실천할 요량으로, 또 교육적으로도 그 시기에는 대화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딸에게 수시로 그 아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곤 했었다. 그러면 딸애는 내 작전에 잘도 넘어 와서 그 남자애에게 느끼는 감정들을 졸졸 얘기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 남자애를 지켜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너무 감정이입을 한 것인지 석달동안 꼭 내가 사랑에 빠진 기분이었다. 사이가 너무 좋은 부부가 입덧을 같이 한다더니, 나도 내가 딸아이를 이 정도로 나와 동일시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서, 새삼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그 남자애만 생각하면 흐뭇해지는 동안, 어느새 딸애는 이제는 더 이상 그애를 안 좋아한다고 벼락 선언을 해버렸을 때는 어찌나 서운하던지, 오죽하면 누구를 좋아하면 최소한 일년쯤은 좋아해야 하는거 아니냐고 말도 안되는 항의를 딸애에게 했을까. 생각해 보면, 아침이면 머리에 이쁜 핀이라도 하나 꽂아주고 싶어한 건 나였지 딸아이는 여전히 멋 내는데는 관심이 없었으며, 딸아이가 쇼팽의 즉흥환상곡이나 시벨리우스의 로맨스 같은 곡을 치고 있으면 피아노 소리에서 무언가 더 애틋하고 달콤한 감정의 자락을 짚어내고 싶어했던 것도 나였었다.
아마도 딸애는 이제부터 누군가에게 이성으로 관심도 가졌다가, 또 그 감정이 친구로 돌아왔다가 그렇게 지낼 날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는 정말 사랑을 하게 되어 마음이 저릿저릿 아픈 것도 경험하고, 어느 한사람이 존재함으로써 세상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 지도 아는 날이 올 것이다. 이왕이면 그런 날이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눈이 많이 성숙되어 있을 때에 오기를 바라지만 에미의 욕심일 뿐, 어디 내맘대로 모든게 되는가 말이다. 차라리 남편이 진작부터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을 딸아이의 배필을 위해서도 기도하듯이, 같이 기도하고 내 아이가 자신과 타인의 삶 모두를 귀하게 여기고 삶을 진지하게 살 수 있도록 바른 가치관을 심어줄 밖에는. 그리고, 그 때까지 딸과 항상 대화의 문이 열려있는 부모로 남는게 큰 숙제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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