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사는 이야기
▶ 백재욱 <리맥스 100 부동산 대표>
NBA 올 시즌이 끝났다. LA의 레이커스팀이 2연패의 영광을 거머쥔 지난 주 금요일 밤, 아마도 제일 기뻐한 사람은 A의 부인이었으리라. 레이커스의 우승이 기쁜 게 아니라, 한동안 NBA 게임 중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
생활비를 줄이고 줄여 A부부가 대형 TV를 사고, 케이블 채널 시청료를 매달 50불씩 내는 이유는 단 한가지, 스포츠 채널 때문인데, 농구광인 남편 A는 지난 몇달 동안 농구게임이 있는 날이면 만사를 작파하고 집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A는 차에서 내리면서 차 창문에 휘날리고 다니던 레이커스 깃발을 일단 떼어 집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허둥지둥 샤워를 하고 그가 갈아입는 옷은 레이커스 유니폼. 홈경기 때는 노랑색을, 어웨이 게임일 때는 보라색을 선수들과 똑같이 꺼내 입고 TV앞에 바짝 다가앉는다. 깃발은 그의 손아귀에 으스러지게 쥐어져 있다. 부인은 A를 식탁 앞에 앉힌다는 것이 불가능한 줄 이미 알고 있으므로, 광고시간에나마 손쉽게 집어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남편 곁에 주루룩 가져다 놓는다.
A의 부인은 원래 어떤 스포츠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마치 자전거와 물고기처럼. 물고기가 자전거를 본들 어찌하겠으며, 자전거 역시 물고기가 곁에 있은들 무엇을 함께 도모할 것인가. 그렇게 살던 그녀는 A를 남편으로 둔 덕에 농구와 ‘웬수’가 되었다. 저놈의 농구…가 그녀의 입에 붙은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당 페이를 받는 A가 시즌만 시작되면 별의별 지략을 다 짜내어 하루 일과를 황황히 마무리짓고 돌아오니 당장 가계가 휘청거린다. 그렇다고 샤킬이나 코비가 그들의 천만불 단위 연봉에서 단돈 십불인들 A네 살림에 보탤 것도 아닌데.
신혼 때는 죽어라 하고 남편이 그녀를 곁에 붙잡아 앉힌 채 저 선수는 어디 출신이며 특기는 뭐고 전적은 어찌어찌 하다고 설명을 하는가 하면 선수들에겐 들릴 턱도 없는 코치를 해가며 고래고래 응원을 하다가 죽일 놈 살릴 놈 욕을 퍼붓기도 하고, 돌연 박장대소를 하며 좋아서 발을 구르기도 하는 바람에 ‘이 남자 혹시 정신병자 아닐까’ 했다는데, 이제는 그나마 남편이 혼자 보는 바람에 숨 좀 쉴 것 같다는 게 그녀의 자위다.
큰 소리를 병적으로 못 견뎌하는 그녀 때문에 A는 TV 소리를 꺼놓은 채 화면만 보고, 소리는 라디오 이어폰을 귀에 낀 채 자기가 좋아하는 해설자의 것으로 들으므로 초반 몇분 정도는 집안에 짐짓 아무 일도 없는 듯 하다. 그러나 그 정적은 단 얼마도 못 가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A의 고함과 휘두르는 깃발의 펄럭임으로 깨지고 그때마다 경기하듯 놀란 A의 아내 입에선 ‘저 놈의 농구…’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최종 게임의 첫날 레이커스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게 어처구니없이 졌을 때 A의 목소리는 완전히 가버렸다. ‘그걸 농구라고 하냐?’ ‘거기서 쏘면 들어갈 것 같아서 던져? 야야 죽어라 죽어’ ‘열흘 노는 동안 어디서 뭘 하다 왔기에…’ 평소의 점잖고 침착한 A는 어디로 갔을까. 저 사람의 진짜 모습은 저게 아닐까. 부인의 마음 속에선 회의와 실망이 계속 자리바꿈을 하고… 2차, 3차 게임에서 다시 레이커스가 페이스를 되찾으면서 A의 쉰 목소리도 조금씩 되돌아왔는데 정작 마지막 게임이 돼버린 금요일 아뿔싸, A는 출장을 떠나야만 했다나. 게임시간이 공교롭게 중요한 회의시간과 겹쳤으니 그때의 A 모습이 상상이 된다.
’내가 미쳤나봐요. 녹화를 해두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내 평생에 처음으로 녹화라는 걸 해보는데, 일단 테입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만 알았으면 됐지, 내가 그 게임을 왜 내내 보고 있는 거냐구요. 혼자서 소리를 지르면서 방바닥을 탕탕 치는데 남편이 곁에서 설명해 주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거예요. 인질로 장기간 잡혔던 사람들이 오히려 인질범과 나중에 사랑에 빠진다는 이론이 뭔지 알 것 같아요’ A의 부인이 남편에겐 꼭 비밀로 해달라며 건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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