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사는 이야기
▶ 전효숙 (윌셔연합감리교회 성가대 지휘자)
내가 군악 대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매주일 마다 한번씩 갖는 부락 축제는 추장의 생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축제가 아니었다면 추장은 무슨 재미로 살까 싶을 정도로,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한시간이었다. 일찌감치 근대화를 이룩한 이웃 부락들은 대부분 30분이면 끝나는 일이다. 식순에 있는 부락 찬가를 부를 때면, 혼자 신이 나서 군악대로 하여금 몇 번씩 반복케 하는 것은 예사였다. 한번은 후렴을 열 번 넘게 불러 내가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뻔한 적도 있다. 게다가 추장은 흘러간 유행가를 좋아해 축제의 엄숙한 순서에도 느닷없이 네 박자 차차차를 부르겠다고 고집을 펴서 내가 진땀을 뺀 적도 있다. 연설 중에 반음 정도 불안한 음정으로 쏠로를 하게되면 아무도 못 말린다.
추장은 우리 부락에서 결코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지도 못했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도 아니었다. 의회는 사분 오열했고, 장관쯤 되면 추장 보다 목소리가 커진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권력의 누수현상은 처음부터 있었던 셈이다. 추장은 그저 의회가 내린 결정대로 따라할 뿐인데, 때로는 그것도 제대로 못해 의원들로부터 야유를 받고 머쓱해 하곤 했다. 이게 민주주의라면 우리 부락은 민주주의의 꽃이었다.
그런데, 참 기가 막힌 일은, 의회가 서로 싸움질 할 때, 추장은 여야를 찾아다니며 모두가 자기 잘못이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사과를 하며 다닌다는 것이다. 덕분에 일들이 잘 마무리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싸운 당사자의 잘못이 아니고 추장이라는 지도자의 잘못이라니, 의회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참 속도 없는 양반이지, 추장은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우기는 사람이었다.
그가 우리 부락에 말뚝을 박고 추장 노릇 22년을 했으니, 다른 추장들 같으면 지금쯤 남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적당한 노후 대책용 별장 하나 정도는 있을 텐데, 우리 추장은 빈 털털이였다. 없는 주제에 씀씀이는 보통 큰손이 아니었다. 부락민들의 초상집, 잔치 집은 빼놓지 않고 찾아다녔으니 조의금이나 축의금만 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추장직에 취임해서부터 부락 살림이 어렵다고 월급 봉투를 통째로 의회에 돌려주었으니, 무슨 판공비라는 게 따로 있을 리도 없었다. 우리가 가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면, 영부인이 직장생활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오히려 큰 소리였다.
추장이 재직기간 동안 가장 힘 쓴 일 중의 하나는 산너머 강 건너에 있다는 가난한 부락을 돕는 일이었다. 우리가 알기로는, 그들은 전쟁을 일삼고, 걸핏하면 우리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위험한 부락이었다. 그러나, 추장은 그들이 우리 형제라고 했고, 형제가 당장 굶어 죽는다며 군악대를 앞세워 모금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부락의 쌀독을 통째로 갖다 준 적도 있다. 쌀독을 퍼 주는 과정에서도 그들은 우리 북방 한계선을 침범했지만, 추장은 햇볕 정책을 운운하며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너머 강 건너의 그 가난한 부락 얘기만 나오면, 그 형제들이 굶는 것도 자신의 잘못이라며, 주책없이 아무 데서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웃 부락의 추장은 그 나이 보다 5년이나 더 군림을 했는데, 우리 추장은 빨리 은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만하면, 무슨 봉사단체의 이사장이나 사회단체의 총재 자리쯤은 만들어 놓았으리라 짐작했지만, 그는 그냥 집으로 간다고 했다. 군악대에서는 그의 정년 퇴임을 기념하는 음악회를 개최해 그가 좋아하는 차차차를 연주했다. 부락민들은 추장을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렸고, 그들의 얼굴에는 맘속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의 빛이 역력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추장들이나, 외교사절들, 그리고, 넥타이를 매고 점잖게 나타난 우리 부락의 상하원 의원들도 그날은 함께 울었다. 스스로 어눌한 말솜씨를 아는 탓인지, 추장은 이별조차 노래로 대신했다. 불안한 음정으로 "Time To Say Goodbye"를 불렀으나, 그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오히려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추장 이창순 목사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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