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프리카의 킬링필드, 르완다를 가다’ (5)
▶ CLWMF 김평육 목사
■유치원. 고아원 개원
현장 취재 중에 만났던 가파링가 사모와 약속한대로 95년 2월 두 번째 르완다를 찾아갔다. 이번에는 목사인 필자 외에도 자원봉사자로 한의사와 미용사를 한 사람씩 동행했다.
가파링가 사모는 목사였던 남편이 전쟁 중에 살해돼 교단 측으로부터 목사관을 비우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갈 곳 없는 50명의 전쟁고아를 위해 새로 건물을 신축할 형편도 못됐고 급한 대로 집을 렌트해 고아원과 유치원으로 개조, 어린이 사역에 나설 계획이었다. 전쟁 후 르완다 성인 인구의 70%를 차지한 여성들은 대부분 남편과 자녀가 학살당한 미망인들이었다.
이들이 전쟁 고아들을 서너 명씩 맡아서 기르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한국은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르완다에서는 전쟁의 상처와 굶주림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든 과부들이 고아들을 입양해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전쟁 미망인들이 기르는 고아들에게 놀이터라도 제공하자는 것이 유치원을 개원하는 목적이었다.
키갈리에서 고아원과 유치원으로 이용할 만한 건물을 찾기는 어려웠다.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됐고 남아있는 쓸만한 건물들은 이미 국제 기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허름한 집이라도 얻어 일단 50명이 살수 있는 고아원을 만들고 유치원은 교회 공간을 빌리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유치원 교사 생활비와 교재 등은 우리가 제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몇몇 교회와 유치원 개원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관심이 어린이들의 교육보다는 지원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아예 직접 관리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가파링가 사모에게 고아원과 유치원을 운영할 만한 장소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더니 교회 뒤편에 좋은 건물이 비어 있다며 안내했다. 교실 3개와 사무실 1개가 있는 학교건물과 50명 정도의 어린이들이 살수 있는 공간도 별도로 마련돼 있었다. 당시 외국인들에게 방3개가 있는 집의 렌트비가 1,000달러가 넘어 무척 비쌀 것이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르완다로 떠날 때 마음속에 그렸던 건물의 조건과 너무나 일치해 반드시 이 건물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주인을 찾았다.
며칠 뒤 사역을 돕던 사무엘 장로가 건물을 렌트할 사람을 찾아냈다. 한 달 렌트비가 겨우 350달러로 상상도 못했던 싼 가격이었다. 원주민간에 흥정이 이뤄져 이 정도 가격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유엔과 여러 구호단체가 이 건물을 사용하고 싶어했지만 사람을 찾지 못했는데 우리가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때문이리라. 사무엘은 유치원생을 모집했고 가파링가 사모는 고아원 개원을 준비했다. 고아원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침대와 매트리스, 주방기구, 어린이들을 돌볼 직원 채용 등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유치원이 개원됐다. 입학식 날 모집 예상 인원 60명을 초과한 146명의 어린이들이 몰려들었다. 정원을 제한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모두를 등록시켰고 키갈리식의 큰 잔치를 벌여 입학식을 진행했다.
가파링가 사모는 전쟁 중 피해가 심했던 무지세라 지방에서 50명의 어린이를 입양했다. 정문을 통해 줄지어 들어오는 어린이들은 누더기를 걸친 채 하얀 비닐 봉지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봉지에는 제법 깨끗한 옷 한 두벌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냄새 나는 어린이들을 씻긴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히고 이들과 한방에서 뒹굴면서 어느덧 나도 모르는 사이에 르완다 고아들의 아버지 역할을 맡게 됐다. 기쁜 일이 일어났다.
새로 입주한 50명의 어린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 지금까지 각각 다른 가정에서 살아왔는데, 고아원에 입주하는 날 세 쌍의 형제, 자매들이 재회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더구나 이들 중 한 쌍은 쌍둥이 자매였다.
하지만 밤마다 계속되는 어린이들의 기침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전쟁 중에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살아왔을까? 어떤 어린이는 천식으로 심한 기침을 해대며 밤을 꼬박 새기도 했다. 이들에게 기침약을 계속 먹였더니 점차 기침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들 중 3명은 약을 복용한지 몇 주가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밤새도록 내장을 끌어내는 듯한 기침소리가 들려 마음 아팠다.어느 날 새벽 두 시였다. 문득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침하는 한 아이를 방으로
데려와 침대에 눕히고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 아이가 지금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제가 하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줄은 알 겁니다. 이 아이의 기침을 멈추게 하셔서 어린것의 마음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3일간 세 어린이를 위해 기도를 드렸는데 기적과 같이 모두 기침이 없어졌다.
마당에서는 고아 어린이들이 비닐봉지를 둥글게 말아 끈으로 묶어 만든 공으로 축구를 하고 있었다. 비가 내려 흙은 다 씻겨 내려갔고 자갈밭인 마당에서 어린이들이 맨발로 공을 차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한국전쟁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 구호단체와 선교사들이 전해준 구호품으로 생명을 유지했는데 이제 세계를 향해 베푸는 나라, 베푸는 교회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감동이 일었다.
한 아이가 공을 찰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공 뒤에는 돌부리가 있었다. 맨발로 저 공을 차면 돌부리를 찰 것이 분명했다. 아이는 돌부리를 냅다 발로 차고는 푹 쓰러지며 뒹굴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현상일까? 나의 엄지발가락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짜릿한 통증을 느낀 것이다.
매일 저녁 어린이들의 노래 소리가 키갈리 하늘에 퍼졌다. 오후 7시께 저녁을 마치면 그 때부터 우리는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찬송과 춤으로 우리만의 축제를 벌였다. 노래책도 없는데 한 아이가 노래를 부르면 50명의 다른 어린이들은 모두 춤을 추며 4부 또는 5부의 아름다운 화음을 냈다. 수많은 어려움으로 ‘사역을 중단할까’하는 생각이 들 때면 당시 밤마다 들려오던 어린이들의 노랫소리가 생각이 났다.
이제는 모두 나의 아들딸이 된 르완다 전쟁고아 50명이 밤마다 부르던 노래가 나를 지치지 않게 만들었던 힘의 원천이었다.
난민촌 현장을 취재하는 동안 난민촌 선교의 큰 비전을 확인한 까닭에 자원봉사단을 미국으로 돌려보내고 필자는 난민촌 선교의 모험을 준비하게 됐다. 르완다에는 투치족, 난민촌에는 후투족이 따로 살로 있었으니 조심해서 일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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