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프리카의 킬링필드, 르완다를 가다’ (6)
▶ CLWMF 김평육 목사
우여곡절 끝에 고아원과 유치원을 개원하고 어린이 사역을 계속하다보니 어느덧 두 달이 지나 95년 4월을 르완다 현지에서 맞았다.
가파링가 사모와 사무엘 장로가 진심으로 도와줘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헌데 사무엘 장로를 놓고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나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무엘 장로가 저렇게 열심인 이유는 김(필자)으로부터 돈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만 그런 줄 알았더니 르완다 사람들은 더 심했다.
이 때문에 매우 난처해하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기왕에 돈 먹었다는 소리를 들을 바에야 왕창 먹으세요. 시시하게 몇천달러 요구하지 말고 가장 큰 소원이 뭔지 말해봐요. 하나님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축복 받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좀 봐야 돼요"라고.
사무엘의 소원은 소박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에서 상과를 공부하고 재무부에 근무하던 사무엘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것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영어권 나라에서 영어와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그 정도는 들어줄 만한 소원인 것 같았다.
마침 탄자니아 난민촌 사역을 준비중이었는데 사무엘에게 이 계획을 이야기했다. "탄자니아 응가라(Ngara)지역의 난민촌으로 가려고 합니다. 르완다, 부룬디에서 피난해온 수십만명의 후투족이 모여서 살고 있는 황금어장과도 같은 선교지역입니다. 나와 함께 일할 후투족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탄자니아 난민촌에서 1년간 사역을 하고 이 계획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하면 어떻겠냐?"고.
곰곰이 생각해 보겠다며 집으로 돌아갔던 사무엘이 아침 일찍 상기된 모습으로 찾아왔다. "어젯밤 말씀해 주신 난민촌 선교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공부는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난민촌 선교를 제가 담당하겠습니다"며 굳은 의지를 밝혔다. 그 때가 95년 4월3일이었다.
필자는 4월5일 우간다를 경유해 탄자니아에 입국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사무엘이 출국을 준비할 시간은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사무엘과 상의한 후 둘이 먼저 탄자니아로 가서 선교부를 마련한 뒤 돌아와 사무엘의 가족을 데려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난민촌 선교와 사무엘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데 이상하게 자꾸 사무엘의 가족이 마음에 걸렸다. "만일 사무엘이 탄자니아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공연히 이산가족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사무엘을 사무실로 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 가족들이 함께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출국하니까 오늘 준비를 서두르십시오"라고 이야기했다. 사무엘도 "저도 가족 문제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족이 함께 떠나도록 곧 준비하겠습니다"라며 흔쾌히 수락했다.
다음날인 4월5일 아침 키갈리 버스 터미널에서 사무엘과 그 가족들을 만나 르완다 국경을 벗어나니 벌써 정오가 넘었다. 넓은 평야가 펼쳐진 우간다에 도착하자 사무엘은 감탄을 연발했다. 르완다는 가파른 산허리를 일구어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우간다에는 넓은 평야가 그대로 방치돼 있는 것을 보고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는 눈치였다.
우간다 캄팔라에 있는 한 여인숙에 투숙했는데 사무엘이 르완다 국경이 폐쇄됐다는 뉴스를 들었다며 달려왔다. 우리가 르완다 국경을 벗어나자 바로 폐쇄된 모양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르완다에 발이 묶일 뻔했다.
4월6일은 르완다 전쟁 1주년으로 투치족들이 흥분해 여기저기서 후투족들을 살해했고 보복을 두려워한 많은 후투족들이 르완다 국경을 넘으려다 이마저 폐쇄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채 여행 일정을 잡았는데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 날 사무엘은 큰 기적을 체험했다. 4월6일 르완다 군부는 전범 혐의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했다. 재무부에 근무했던 사무엘도 전범으로 지목돼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쳤는데 이미 사라졌으니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만약 사무엘이 그대로 르완다에 있었더라면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판도 받지 못한채 그대로 감옥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선교사의 일을 돕다가 생명을 건지는 상금을 받게된 것이다. 훗날 사무엘은 벨기에로 망명했다.
국경 폐쇄 소식에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린 우리 일행은 탄자니아로 입국하기 위해 빅토리아 호수의 항구를 찾아갔다. 현재는 우간다에서 탄자니아로 가는 배편이 모두 중단됐지만 95년에는 여객선이 운항 중이었다. 아침에 부두로 갔지만 배는 오후 3시에 출항할 예정이었다.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처지여서 부둣가에 그대로 주저앉아 오후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또다시 뜻하지 않은 벽을 만나게 됐다. 르완다 사람들의 탄자니아 입국을 금지한다며 출국수속을 거절했다. 탄자니아 정부 또한 르완다인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르완다인 청년 하나가 우간다 이민국 직원과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알로이라는 청년이었는데 하소연도 언쟁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제 사무엘과 알로이는 갈 곳 없는 난민 신세가 됐다.
하는 수 없이 캄팔라 시내로 돌아와 다시 하룻밤을 지내려는데 알로이가 사정하며 동행을 원했다. 의대생이었던 알로이는 가족 모두가 전쟁에서 죽었는데 유일하게 여동생 하나가 탄자니아 난민촌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여비도 없이 무작정 떠난 여행길에서 외국인을 만났으니 알로이로서는 횡재나 다름없었다.
다음날 사무엘의 가족과 알로이를 데리고 우간다와 탄자니아의 국경인 무투쿨라(Mutukula)로 갔다. 지난해 난민촌 현장취재 때 통과했던 국경이어서 이곳 이민국 직원들을 몇 명 알고 있었다.
이들에게 이번 선교 여행의 취지를 설명한 뒤 일주일 정도만 부코바에서 체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사무엘과 알로이의 여권에 입국비자를 찍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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