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프리카의 킬링필드, 르완다를 가다’ (7)
▶ CLWMF 김평육 목사
탄자니아에 입국해 육로로 부코바까지 갔다가 배편으로 무완자로 향하는 길에 어려움이 많았다. 곳곳에서 르완다인의 통행을 제한했고 그때마다 사무엘과 알로이를 보호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더구나 사무엘은 아내와 두 아들까지 딸려 있어서 어려움이 더했다.
둘째 아들 파시피크는 전쟁 중에 태어난 아들인데 한살이 되도록 몸을 혼자 가눌 수 없을 만큼 연약했고 기침도 그치지 않았다. 배는 밤 9시에 출항해 이튿날 아침 8시 무완자에 도착했다.
3등 객실에서 난민들 속에 끼여 쪼그리고 밤을 지샜는데 우리도 영락없는 난민 신세였다.사무엘의 부인과 아이들을 무완자에 있는 한인 선교사에게 맡기고 응가라 캠프로 길을 재촉했다. 난민촌이 가까워오자 곳곳에 르완다 정보부 요원들이 깔려 있어서 사무엘이 무척 두려워했다.
전쟁 1주년을 맞아 전범자들에 대한 공개 재판을 여는 등 투치족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자 보복을 두려워한 후투족들이 탄자니아로 밀려오고 있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는 국경을 넘어 꾸역꾸역 밀려드는 난민들 처리에 부산한 모습이었다.
난민촌 선교를 위해 데려간 사무엘과 알로이가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선교는 둘째 문제가 되었다. 당장 사무엘과 알로이를 망명시키는 일이 급해졌다.
둘 다 잠비아로 가기를 원했다. 탄자니아의 수도 다 에스살렘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기차를 타고 수십 시간을 가야 하는 먼길이었다. 열흘은 족히 걸리는 긴 여행이었다. 잠비아 국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내와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가야 했다.
우선 난민촌을 빠져 나와야 하는데 차량이 없어서 난감했다. 사무엘과 알로이가 난민들에게 잡히면 간첩으로 몰려 살해당할 우려가 있어서 트럭으로는 난민촌을 통과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일본인 사람들이 운영하는 NGO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우리의 행동이 대단히 용감하다며, 운전사와 차량을 제공해 줬다. 운전사는 우리 일행을 난민촌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다 주었고 여기서 지나가는 트럭을 기다렸다가 부코바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부코바에서 그날 밤 무완자로 가는 배를 탈 예정이었는데 알로이가 여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고 한다. 유엔이 난민들을 수용하면서 출신지역에 따라 캠프를 설치했는데 알로이의 출신지역인 키붕고 사람들은 카라괴 캠프에 수용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동생이 살아 있다는데 만나지도 못하고 잠비아로 보낼 수는 없었다.
"이틀 정도 시간을 줄 테니 카라괴로 가서 동생의 생사를 확인하고 가능하면 데리고 나오십시오. 어떻게 해서든 동생을 잠비아로 데리고 갑시다"라고 제안했더니 알로이로부터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동생을 찾지 않겠습니다. 여권을 가진 저도 이렇게 탄자니아를 숨어 다녀야 하는데, 여권도 없는 동생이 어떻게 잠비아로 갈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난민촌에 그냥 두
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는 것이다.
이에 "그래도 동생의 생사는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량을 빌려 줄 테니 난민촌에 가서 여동생을 찾아보고 동생이 원할 경우 이리로 데려 오십시오. 어떻게든 동생을 도와 줄 방법이 있을 겁니다"라고 설득했다.
다음날 새벽 택시가 왔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알로이만 보낼 수는 없었다. 르완다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여권을 빼앗기고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 모를텐데…. 결국 필자가 동행해 보호해 주겠다고 했더니 사무엘도 따라 나섰다.
산적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깊은 산길을 달려갔다. 난민촌이 가까워지면서 갈기갈기 찢겨진 옷에 맨발로 땔감을 찾아 돌아다니는 난민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난민촌 입구에서 갑자기 알로이가 택시를 멈추었다. 알로이가 살았던 키붕고 출신의 난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는데 고향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이다. 필자와 사무엘은 무서워서 잔뜩 긴장해 있는데 알로이는 신바람이 나서 친구와 부둥켜안고 이야기를 나누다 여동생의 소재를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알로이 친구의 안내로 동생을 찾아간 곳은 난민촌 중앙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살기 등등한 난민들이 널려있어서 밀려드는 공포감을 주체 할 수 없었다. 알로이는 동생을 만난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지만 사무엘에게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차를 적십자사 캠프로 옮겼다. 공포에 질린 탄자니아인 운전 기사와 사무엘을 적십자 캠프에 맡기고 알로이와 함께 여동생을 찾아갔다.
헌데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알로이와 함께 찾아간 초막에는 여동생뿐만 아니라 모두 죽은 줄 알았던 부모와 형제들이 생존해 있는 것이 아닌가? 알로이 가족들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런 소동에 난민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알로이는 필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것저것 과장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었다.
"투치군에 쫓기고 있을 때 미스터 김이 나를 구해주었다. 우간다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미스터 김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우리는 잠비아로 망명하러 가는 길이다. 미스터 김은 앞으로 내가 잠비아에서 공부를 계속 하도록 도와 줄 예정이다"는 내용이었다. 알로이의 말을 전해들은 난민촌 사람들은 필자에게 손뼉을 치며 감사를 표시했다.
졸지에 후투족 난민들로부터 알로이를 구한 영웅으로 대접받게된 것이다.
곧이어 가족회의가 열렸다. 알로이의 어머니는 알로이가 난민촌에서 함께 살기를 원했지만 동네 사람들과 의논을 한 아버지가 필자에게 아들을 잠비아로 데리고 가서 더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알로이의 가족으로부터 보호를 간곡하게 부탁 받은 뒤 난민촌을 빠져 나온 우리 일행은 부코바로 향했는데 문득 ‘하나님이 난민촌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알로이를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사람 어느 누구도 살인과 약탈이 난무하는 르완다 난민촌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데 필자는 알로이의 부모형제 그리고 난민들의 보호를 받으며 난민촌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무엘과 알로이에게 말했다. "잠비아로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우간다로 갑시다. 우간다에서 신학교에 입학하고 공부하며 이곳 카라괴 난민촌에서 난민사역을 합시다"라고. 두 사람을 우간다의 신학교에 입학시킨 뒤 필자는 르완다의 고아원을 점검하기 위해 르완다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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