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의 유물, 미국의 대저택’
▶ (7) 롱아일랜드 벤더빌트 가
운송왕 코넬리우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Sr.)는 1794년 5월27일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출생했다. 어릴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나룻배로 배추를 뉴욕에 실어다 파는 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다.
본래 건장한 체구의 밴더빌트는 11살 되던 해에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기로 작정했다. 어머니에게서 100달러를 빌려 나룻배를 사고 일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원금과 이자 1,000달러를 붙여서 갚을 정도로 수완이 좋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정직하나 원래 듣고 배운 것이라고는 없어 쌍욕도 서슴치 않았다.
나룻배 사업으로 돈을 번 그는 이미 뱃길이건 철길이건 간에 운송사업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한 우물만 팠다.
사업을 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정치와 담합해서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로지 시장경제에 의존, 재산을 모으는 이도 있다. 밴더빌트는 후자에 속한다.
밴더빌트는 무식하고 배운 것은 없었으나 무척 부지런했고 항상 주변 시장을 꿰뚫어 보는 본능적인 감각을 타고났다. 스태튼 아일랜드와 뉴욕만을 왕복하던 그는 뉴욕에서 뉴저지로, 필라델피아까지 사람과 화물을 운반하는 페리라인을 시작했다. 필라델피아를 왕복하는 사람들은 필라델피아에서 하루밤을 잘 수 밖에 없으므로 그의 부인은 그곳에서 여관업을 하였다. 내외가 벌어들이는 돈이 사업 확장이나 발전을 거듭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바로 이때 영국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돼 기차를 만들고 대량수송이 시작되는 등 산업혁명이 도래했다. 이때부터 사업은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 대량수송이 주를 이루었다.
이 기계화의 물결은 밴더빌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 스팀 쉽(Steam Ship)이 운행되자 기술을 배우기 위해 사업을 그만 두었다. 당시 허드슨강을 오르내리는 스팀 쉽 라인에 취직을 했다. 대단한 결단력이었다.
토마스 기븐스라는 사장 밑에서 증기기관선 운행술을 배우며 일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냈다. 다른 회사에서 4달러씩 받는 운임을 밴더빌트는 1달러씩 매기고 대신 배 안에서 판매하는 식품을 비싸게 받았다. 자연히 손님이 몰려들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경쟁자인 제이 드류는 정부에서 정해준 고시가격 위반이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자유경쟁의 자본주의에서 고시가격은 있을 수 없다’고 판결, 밴더빌트와 기븐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는 허드슨 라인을 점차 기븐스와 밴더빌트의 독무대로 변하게 했다.
증기기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된 밴더빌트는 더 큰 사업을 머리에 그렸다. 증기기관선을 여러 척 구입, 뉴욕, 필라델피아, 롱아일랜드 사운드, 커네티컷,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 보스턴까지로 선편을 확장했다. 대서양에는 온통 밴더빌트의 배로 가득 차게 됐다.
이때는 캘리포니아주에서 금광이 발견돼 누구나 일확천금의 노다지를 찾으러 그곳으로 떠났다. 동부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조랑말을 타고 가면 도중에 인디안의 습격을 받기도 했고 운좋게 이를 피해도 장장 3,000마일을 가는 여정이 너무 지루했다.
이같은 캘리포니아행 교통편을 바꾼 사람이 밴더빌트였다. 증기기관선을 타고 뉴욕에서 남미를 돌아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장거리 여행은 편안할지 모르나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밴더빌트는 지도를 놓고 연구 끝에 니카라과의 동서로 뚫려있는 산 후안 강으로 들어가 태평양으로 나가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시간이 크게 단축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선박편을 이용하게 되었다.
존 웨인과 스튜어트 그렌저가 출연하는 뉴올리언즈에서 알라스카 앵커리지까지 가는 여정을 그린 북극성(Northern Star)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기에 등장하는 배가 바로 밴더빌트의 배에 대한 것이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데 걸리던 기간을 159일에서 90일로 단축하였다. 나중에는 35일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바로 이 무렵 1812년 전쟁이 시작돼 뉴욕의 군사기지에 식료품을 배로 실어나르는 군납 사업이 생겼다. 그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아 계약을 하고 각종 비용을 제하고도 9,000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의 사업 시야가 점차 넓어져 철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돈을 쓰기 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인데다 검소하고 알뜰하게 살아 돈은 계속 쌓여만 갔다.
그는 돈을 벌어 사업을 확장하는데 비해 사회를 위한 자선 헌금에는 인색했다. 주위의 비난이 일자 5만달러를 뉴욕의 Church of Strangers에 헌금했고, 당시 운영난에 처한 Central University에 100만달러를 희사, 오늘의 Vanderbilt University가 되게 한 게 고작이었다.
검소하게 산 그에 비해 아들 윌리암 밴더빌트는 사치와 낭비 생활을 계속했다. 주위의 눈도 의식하질 않고 방탕한 생활에 파묻혀 아버지로부터 극히 무능한 아들로 취급받았다.
윌리암은 철도사업에 관심을 가져 할렘 뉴욕 노선을 샀다. 이것으로 아버지의 신임을 얻어 철도회사 부사장직을 맡게 됐다. 이때 할렘에서 유니온 스퀘어 그리고 거기서부터 배터리 팍까지의 노선을 구입하는데 뉴욕 철도회사 대니얼 드류 국장은 시청 관리를 매수해 노선 허가를 취소했다.
유니온 스퀘어로부터 배터리 팍까지는(1863년 4월에 허가가 났음) 마차 노
선이라 하여 이미 난 허가를 취소했다. 그런 후에 대니얼 드류는 증권에 열중하고 밴더빌트를 속이기 위해 증권 쇼트 세일을 시작했다.
밴더빌트가 이를 알고 대처해 4개월 후에 주가가 179달러에 이르렀을 때 400만달러 이상이 되어 밴더빌트가 회사를 통제하게 되었다.(쇼트 세일(Short Sale)은 증권이 쌀 때 증권을 빌려다 팔고, 나중에 값이 떨어질 때 사서 갚는, 이익이 많이 남는 증권 플레이이다. 물론 나중에 증권 값이 올라가더라도 빌린 숫자만큼 사서 채워야하므로 큰 손해가 날 수도 있다.
시카고의 유명한 머천다이즈 마트를 지은 사람이 스탁 쇼트 세일을 하다 이를 눈치챈 케네디 아버지 조셉 케네디에게 적발돼 머천다이즈 마트를 넘겨주게 된 유명한 사례도 있다)여하튼 대니엘 드류는 밴더빌트의 무식함을 얕보다 큰 코를 다친 셈이었다.
라커펠러, 카네기 등은 엄청난 저택이 없는데 비해 밴더빌트는 업스테이트 9번 도로(Hydepark)와 롱아일랜드의 180 Little Neck Rd. Centerport, N.Y.에 저택을 가졌다.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에도 2개나 있다. 다음 호에 이 저택의 중세기 건축양식과 웅장함을 사진과 함께 상세히 기술하겠다.
<윤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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