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간 노숙자에 아침 제공해 온 베델한인교회 교인들
어른들이 새벽부터 만들어 고교생들이 200여명에 대접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우리 조상들은 바랐다. 요즘 이곳 식으로 바꿔 생각하면 바로 할러데이 시즌만 같으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름답게 장식한 집에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마시고, 카드와 선물에 사랑과 정성을 담아 주고 받다보면 한해의 모든 시름을 스르르 잊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좋은 명절에 갈 집이 없는 사람, ‘홈리스’들이 오렌지카운티에도 2만3000여명을 헤아린다.
세상의 최고 명품들이 총집합한 사치스런 샤핑 센터들이 고급 주택단지에서 30분 이내 거리에 즐비한 오렌지카운티의 거리마다 넘실거리는 찬란한 불빛이 닿지 않는 뒷골목, 고물 자동차, 다리 밑이나 싸구려 모텔방에서 선잠을 청하는 이들에게 명절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자, 돕는 손길들도 이 즈음엔 바빠진다.
26년 역사의 어바인 베델한인교회(담임 손인식목사)가 매주 일요일 샌타애나 시빅 센터 앞에서 무숙자들에게 아침을 대접한지는 어언 12년을 헤아린다. 처음엔 작은 규모로 전 교인이 돌아가면서 참여했지만 교회가 커지면서 효율성을 위해 7년전부터는 전문 사역팀을 두고 보통 150~200명분,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주일에는 300명분의 식사를 준비해 고등부 학생들로 하여금 접대하게 한다.
평소 메뉴는 스크램블드 에그와 매시드 포테이토, 소시지-야채 볶음에 빵과 커피, 주스, 우유등 음료로 명절에는 구운 터키나 햄, 옥수수나 얨, 수프, 파이, 케익 등이 추가된다. 2002년도에 2만달러의 교회 예산이 배정됐으므로 매주 300여달러어치 장을 봐다 5명의 부원들이 일요일 새벽 5시에 교회에 모여 조리를 한다. 이미 금요일 저녁에 노숙자 구제부장인 채영희 집사를 비롯한 3명이 장을 봐 600여개의 계란을 깨고, 50파운드의 감자를 깎아 냉장고에 넣어 두었으므로 일요일엔 만들기만 하면 된다.
크리스마스 특별 메뉴를 준비한 지난 22일, 이 교회 주방은 평소보다 더 붐볐다. 한국어 대학부 학생 3명이 도와주러 나왔고, 봉사하러 나오는 아빠를 따라 나와 야무지게 현장에서 먹지 않는 노숙자들이 가져갈 도시락 봉지를 싸는 등 잔일을 돕는 초등학생 꼬마 둘에 기자까지 더해졌지만 햄과 치킨 누들 수프, 콘이 추가됐기 때문에 일손은 더욱 바쁘게 돌아갔다. 어린아이 두어명은 들어가도 될만한 커다란 들통 2개에 토요일에 미리 고아서 썰어 놓은 닭고기, 양파, 당근, 셀러리, 버섯들을 차례로 넣고 있는 전영순씨(53)는 이 팀의 주방장.
요리학원 강사 출신인 전씨는 늙으면 하고 싶어도 못할테니까 더 나이 먹기 전에 남을 위한 일에도 시간을 할애해야겠다는 생각에 2년 전부터 이 팀에 합류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햄을 썰고 있는 안태식씨(46)는 UC 어바인에 1년간 방문중인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유학생 때와 달리 시간 여유가 있으므로 보람있는 일을 찾아 지난 9월부터 이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오븐에 불을 붙이고 무거운 것을 이리저리 나르다가 칼을 잡고 햄을 써는 김광영씨(42)는 브로드캄에 근무하는 전기공학박사. 2년전부터 합류, 일요일 새벽에 일어나기 싫은데도 계속 나오는 이유를 묻자 “잘 모르겠다”고 수줍어했다.
한가지 일이 끝나면 곧 다른 일을 하는 등 말없이 척척 손발이 맡는 이들중 오철씨(40)는 일한지 7개월. 교회 밖에서도 사랑을 실천하고자 이 일에 참여하고 보니 “홈리스들이 전과 달리 보이고, 안나오면 오히려 죄를 짓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일요일이 없는 것 같고 힘들 때도 많지만 그럴 때마다 신앙으로 극복한다는 3년 경력의 채영희씨는 “가끔 노숙자 대열에 한인이 끼어 들 때면 눈물이 난다”고 말한다.
햄을 썰다 옥수수 깡통을 따다 조리하는등 바지런히 움직이는 대학생 문보연양(UCI 3학년)은 고등학생때 6개월쯤 서빙을 했는데 “몇년만에 와서 음식을 만드니 더 재미있다”고 했다.
7시쯤 되니 부엌엔 구수한 수프 냄새, 커피 냄새가 가득하고, 이미 만들어진 것은 보온통에 담겨 하나둘 부엌을 나가기 시작한다. 커뮤니티 서비스 학점도 따고 교회 봉사도 하느라 서빙을 할 고등학생들도 하나둘 들어선다. 안태식씨의 두아들, 김광영씨의 쌍둥이 딸등도 포함돼 있고, 간혹 엉덩이에 걸친 힙합 바지나 빳빳이 세운 머리, 귀고리등 어른들 마음에 들지 않을 차림도 있지만 일요일 아침마다 졸린 눈 비비고 나오는 예쁜 아이들이다.
엘 토로고 10학년으로 7학년부터 참여했다는 토니 김 군은 “일주일에 한가지는 좋은 일을 해야죠”라고 장난을 치면서도 “노숙자들에게 하느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고 진지하게 말한다. 토니의 소개로 2년동안 나왔다는 래리 윤군(유니버시티고 10학년)도 “노숙자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고, 우리가 염려하고 있음을 알게 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40여명이나 모인 아이들과 음식, 테이블, 기타 필요한 장비들을 가득 실은 밴 네 대가 교회를 떠나 시빅 센터에 도착한 7시40분께, 벌써 70여명이 길게 줄을 서서 이들을 기다린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음악을 틀고, 예배드릴 좌석을 만들고, 4개의 스테이션에 상을 차리고 음식을 서브하는 아이들은 준비해간 음식이 남으면 거기 서서 같이 먹기도 한다.
상이 차려지자 홈리스 목회를 한다는 테렌스 윙고 목사가 식사 기도부터 이끈다. 9년째 매주 온다는 이 흑인 목사는 한인들이 이 일로 노숙자들에게 나눔과 희망을 주고 있다고 칭찬한다. 오렌지 거주 황시엽씨(59)도 7년째 매주 노숙자들에게 일회용 물수건을 가지고 와 나눠준다. “작고한 어머니가 저분들이 손을 닦고 먹게 해주길 원하셨거든요”
“비가 와도 헌신적으로 우리를 먹이러 오는 한인 크리스천들은 신실하다”고 칭찬하는 노숙자 그레고리는 2개월전 대망의 숙소를 장만했다면서 반짝거리는 열쇠 한 개를 꺼내 자랑한다. 샌프란시스코, LA등지에서 오래 홈리스로 살았다는 그는 오렌지카운티에 일자리가 많다고 해서 이리로 옮겨 왔다면서 “이곳 노숙자들은 매우 점잖다. LA 같았으면 줄을 서기는커녕 싸우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고 했다.
이혼 증가와 함께 여자 노숙자들이 늘고 있지만 오렌지카운티에는 2~3년 이상 장기 노숙자가 없다는 것이 윙고 목사의 관찰담. 그래도 일자리를 얻어 집을 얻거나, 가정을 꾸리거나, 잘못되면 교도소로 떠난 자리를 계속 새로운 사람들이 메꾸고 있다고 말한다.
노숙자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서 아침을 먹는 한쪽에선 예배가 진행되고 이제 더 먹으러 오는 사람도, 음식도 떨어진 이들은 쓰레기를 주워 모으면서 다시 짐을 싸기 시작한다. 9시에 출발하여 교회로 돌아온 시간은 9시15분. 일단 뿔뿔이 헤어져 9시45분에 시작되는 2부 예배에 참석한 후에 뒷정리를 하기로 한다.
예배 보러 급히 가는 김광영씨에게 다시 왜 이일을 계속하느냐고 다그쳤더니 “내가 받은 많은 축복을 나누기 위해서 같아요”라고 조그맣게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얼마나 가진 것이 많은가. 누군가는 “나눌 것이 없는 가난은 없다”고 말했다는데 재물이나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관심이나 배려, 존중까지 나누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고 무조건 주고 또 주다보면 돌고 돌아 반드시 자신도 받게될 터이다. 세월 따라 달력은 바뀌어도 우리네 마음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할러데이 시즌만 같기를 기원한다.
<김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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